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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링컨 – 나무위키
미국의 역사 및 정치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로서,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자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명이다. 역대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4/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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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링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이브러햄 링컨(영어: 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 ~ 1865년 4월 15일)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다. 그는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내부적 위기로부터 나라를 …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4/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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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링컨 암살 사건은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난 지 5일 후인 1865년 4월 14일 금요일(성금요일) 오후 10시경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포드 극장에서 남부 …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2/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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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링컨의 생애와 업적
에이브러햄 링컨 생애 : 1809년 2월 12일 ~ 1865년 4월 15일 1861년 3월부터 암살당한 1865년 4월까지 미국의 16번째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Source: contents.premium.naver.com
Date Published: 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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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링컨 – 위키인용집
에이브러햄 링컨(영어: 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 ~ 1865년 4월 15일)은 미국의 제16대(1861년~1865년) 대통령이다. 나에게 나무를 자를 여섯 시간을 준다면, …
Source: ko.wikiquote.org
Date Published: 5/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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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과 공화당 급진파 …
이 논문은 남북전쟁 시기의 미국 대통령과 연방의회 의원 간의 갈등을 여러 가지 쟁점을 통해 알아보았다. 특히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전시의 특권과 권한강화와 …
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4/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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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필드: 에이브러햄 링컨의 유산과 66번 국도의 향수 | GoUSA
일리노이의 주도인 이곳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16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17년 동안 거주한 자택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마을을 관통하는 역사적인 66번 국도와 …
Source: www.gousa.or.kr
Date Published: 12/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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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이브러햄 링컨 –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틀:대통령 정보 틀:에이브러햄 링컨 에이브러햄 링컨(영어: 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 ~ 1863년 4월 15일)은 1861년 3월부터 암살된 1865년 4 …
Source: ko.wikisource.org
Date Published: 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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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링컨 : 제 1차 취임사 (1861) – 주한미국대사관 및 …
Abraham Lincoln. 제1차 취임사. 1861년 3월 4일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당시 남북의 7개주는 이미 연방정부의 어떤 시도에도 반대할 …
Source: kr.usembassy.gov
Date Published: 9/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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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CL9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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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4.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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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링컨
Those midnight stars are sadly dimmed,
That late so brilliantly shone,
And the crimson tinge from cheek and lip,
With the heart’s warm life has flown—
The angel death was hovering night,
And the lovely boy was called to die.
The silken waves of his glossy hair
Lie still over his marble brow,
And the pallid lip and pearly cheek
The presence of Death avow.
Pure little bud in kindness given,
In mercy taken to bloom in heaven.
Happier far is the angel child
With the harp and the crown of gold,
Who warbles now at the Saviour’s feet
The glories to us untold.
Eddie, meet blossom of heavenly love,
Dwells in the spirit-world above.
Angel boy—fare thee well, farewell
Sweet Eddie, we bid thee adieu!
Affection’s wail cannot reach thee now,
Deep though it be, and true.
Bright is the home to him now given,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Heaven.”
그날 밤 별들이 슬피 빛났다.
늦은 밤을 환히 밝히던 별들이.
붉은 빛의 볼과 입술을 지닌 마음 따뜻한 아이의 생명은
밤하늘을 날던 죽음의 천사의 부름에 함께 스러졌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아이의 머릿결은
여전히 그의 이마 위에 찰랑이는데,
그의 창백한 입술과 진주같이 흰 볼은
아이의 죽음을 선포하고 있구나.
친절과 자비로움으로 천국에서 싹틀 순결한 꽃봉오리.
행복하도다, 하프와 금관을 쓰고 주님의 발치에 앉아 노래하는
이 어린 천사의 기쁨이 우리에게는 말로 다 못할 영광이기에.
성령의 나라에서 천국의 사랑으로 꽃을 피울 에디.
어린 천사여, 잘 가렴. 안녕.
사랑스러운 에디, 우리는 작별을 고하네!
우리의 애정어린 울음소리는 너에게 닿지 않으나
이것이 깊고 무거운 진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라 하였으니,
에디가 그 집을 지금 환히 비추고 있다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이브러햄 링컨(영어: 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 ~ 1865년 4월 15일)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다. 그는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내부적 위기로부터 나라를 이끌어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연방을 보존하였고 노예제를 폐지했다. 그는 당시 미 북서부 변방 개척지에 사는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배우기 보다는 혼자서 스스로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고 독학으로 학업을 마쳤다. 이후 그는 변호사가 되었으며, 일리노이주 의원이 되었고 하원의원을 한 번 했으나 상원 의원 선거에서는 두 번 실패하였다.
링컨은 노예제도의 확장에 대해서 공개적인 반대자였으며, 선거 기간 중 토론과 연설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냈다.[1] 그 결과 그는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확보하였다. 대통령이 된 후에 그는 임기 중 일어났던 남북 전쟁에서 북부주를 이끌며 연방에서 분리하려 노력했던 남부 연방에 승리를 거뒀다. 1863년에는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고, 미국 헌법 수정 제13조의 통과를 주장하며 노예제의 폐지를 이끌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군사적, 정치적 양면으로 내전 승리에 집중했으며, 미국 남부 11개의 주[2]의 분리 독립 선언 이후, 그 주들과 통합할 방법을 계속 모색했다. 그는 전례없는 군사 조치를 취했으며, 분리 독립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재판 없이 수감하거나 구금 조치를 취했다. 링컨은 남북전쟁에서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과 같은 최고 지휘관의 선발에 깊이 관여하며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역사가들은 그가 공화당 내 여러 분파의 지도자를 내각에 참여시킴으로써 당의 분파가 협력하도록 잘 조정했다고 말한다. 링컨은 1861년 말 트랜트호 사건에서 영국과 전쟁 위기까지 몰렸던 위기를 잘 해결했다. 링컨의 리더십 아래, 북군은 남북의 경계가 되던 주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 또 링컨은 186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다시 승리했다. 공화당의 중도파 수장으로서, 링컨은 모든 방향에서 비판을 받았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던 공화당 급진파에서는 남부에 대해 더욱 강한 조치를 촉구했으며, 전쟁에 반대하던 민주당에서는 평화와 협상을 촉구했다. 분리독립주의자들은 링컨을 적으로 보았다.[3] 링컨은 반대파에 지원책을 폄으로서 지지를 끌어내고자 했으며, 뛰어난 수사학 이용과 연설을 통해 대중의 의견을 이끌었다.[4][5] 예를 들어 게티스버그 연설은 미국의 전통인 자유주의 곧 자유, 평등, 민주주의에 대한 상징이 되었으며,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설로 손꼽힌다. 전쟁이 종료돼 가면서 링컨은 전후 재건에 대해 신중한 시각을 보이며 관대한 화해를 통해 국가를 통합하는 정책을 주장했다. 남부연합을 이끌던 로버트 리 장군의 큰 패배가 있은지 6일 후에 링컨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임기 중에 암살되었다. 링컨은 지속적으로 전문가들에게서 모든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으며 영웅, 성자, 순교자가 된 실제 키(193 cm)만큼 역사의 거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성립 당시의 13주 이외의 지역[6]에서 태어난 대통령이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국의 5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초기 생애 [ 편집 ]
출생과 가문 [ 편집 ]
에이브러햄 링컨은 1809년 2월 12일에 토머스 링컨과 발낸시 링컨의 둘째 자녀로 태어났으며, 그의 생가는 통나무집이었다.[7] 링컨의 조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역사가들은 그의 조상을 추적하였고 새뮤얼 링컨을 발견했다. 새무얼은 1637년에 영국 노어포우크로부터 출발하여 미국 매사추세츠주 베이 컬러니에 도착한 수습 직조공 곧 섬유노동자였다.[8][9] 그러나 링컨은 조상에 대해서 자신의 조부 에이브러햄을 알았을 뿐이었고, 손자와 이름이 같았던 조부는 지역 민병대장이었으며, 버지니아 로킹햄 지역의 81만 평방미터(200 acre) 정도의 땅을 상속 받은 건장한 지주였다.[8] 나중에 조부는 가족을 이끌고 로킹햄으로부터 켄터키주의 독일 마을로 이주했다.[8][10] 켄터키로 옮겨온 후 조부는 매복해 있던 미국 원주민에게 습격 받았고, 1786년에 자신의 아이들인 머디카이, 조시아, 토머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10]
아버지 토머스 [ 편집 ]
토머스는 시골 켄터키에서 높이 평가 받는 시민이 되었다. 그는 여러 농장들을 팔고 샀으며, 그 농장 중에는 “싱킹 스프링 팜”(Sinking Spring Farm)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가족은 분리 침례교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그 종파는 높은 도덕적 기준들을 가지고 있어서 술을 마시지 않고, 춤추지 않으며, 노예제도를 반대하였다.[11] 토머스는 켄터키에서 “상당히 즐길만한 위치”에 있었으며, 그 곳에서 배심원 역할을 맡았고 토지의 가격을 측정하고 지역을 순찰하고 죄수들을 지켰다. 그의 아들인 에이브러햄이 태어났을 때, 토마스는 242만 m²(600 acre)의 농장들과 여러 부동산과 가축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그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에 속했다.[8][12] 하지만 1816년에 링컨 가족은 토지에 대한 권리 설정 등기로 인한 소유권 분쟁으로 그들의 땅을 잃었고, 인디애나주 페리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나중에 링컨은 이 이주를 두고 “부분적으로는 노예제도 때문”이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 가장 주된 이유는 토지 등기의 어려움 때문이었다.[13]
어머니의 죽음 [ 편집 ]
에이브러햄 링컨 출생지 국립 공원에 있는 상징적인 통나무 오두막집
1818년 10월 5일에 링컨의 어머니는 독초를 먹은 소에서 짠 우유가 매개체인 우유병 혹은 우유중독으로 34세로 삶을 마감했다.[14] 아내의 죽음으로 집안을 돌볼 사람이 없게 되자, 토머스는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며 링컨이 “엄마”라고 불렀던 친구 사라 존스턴과 1819년 12월 2일에 재혼하였다.[15] 사라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받아다가 씻길 만큼 아이들을 따뜻하게 돌보았고, 책을 좋아하는 링컨의 편을 들어준 덕분에 링컨은 풍부한 학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부친 토머스는 배움은 없었지만 말을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는 훌륭한 이야기꾼이었으므로,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링컨은 연설을 배웠다.[16] 그러나 그 후 링컨은 아버지와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된다. 링컨은 자신의 아버지가 배움이 없는 것이 유감스러웠고, 개척지에서 살면서 해야하는 힘든 노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집안에 있는 남성으로서 해야 하는 잡일들을 감당하였고, 그 결과 가로장 울타리를 짓는데 능숙한 나무꾼이 되었다. 또한 링컨은 21세가 될 때까지 자신이 바깥에 나가 일해서 번 돈을 아버지에게 모두 드리는 당시의 관습에 동의하였다.[14] 이후에 그는 때때로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돈을 빌렸다.[17]
독립 [ 편집 ]
1828년 1월 20일에 링컨의 누나인 사라가 아론 그릭스비와 결혼한지 17개월만에 아이를 낳다가 21세의 나이에 산욕으로 사망했다.[9] 1830년에 공포스런 우유병이 확산되자 링컨 가족은 일리노이 주에 있는 메이콘의 국유지로 이주하였다.[18] 1831년에 그의 아버지는 일리노이주 콜스로 이사를 했고, 당시 22세가 되었던 링컨은 자신의 길을 개척하여 카누를 타고 상가몬 강을 내려가 일리노이 주의 뉴 살렘 마을에 도달하였다.[19] 1831년 봄에 링컨은 뉴 살렘의 사업가 덴톤 오푸트에게 고용되었고, 친구들과 함께 링컨은 뉴살렘으로부터 상가몬 강과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보트로 물건을 실어날랐다. 노예가 직접 목격한 바에 따르면,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링컨은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20] 이처럼 청년 시기에 링컨은 우체국장, 변호사, 뱃사공, 가게점원, 토지측량 등 다양한 일에 종사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오하이오주 국회의원으로 링컨을 경멸했던 제임스 가필드는 링컨 대통령을 가리켜 “일리노이의 이류 변호사가 미래의 모든 세대가 기억할 만한 말을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다니,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뜻밖의 사건이네.”라고 비아냥거렸다.[21] 가필드의 비아냥거림처럼 링컨의 정식 교육은 약 18개월 동안 여러 명의 순회 교사[22]로부터 수업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는 대부분 스스로 공부했으며, 열심히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23] 그는 매우 치열한 레슬링 시합을 치르면서 팔 힘이 세고 대담한 사람으로 알려졌다.[24] 다만 그의 가족과 이웃들은 그를 게으르다고 생각했다.[25][26] 링컨은 동물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아서 사냥이나 낚시를 하지 않았다.[27]
결혼과 가족 [ 편집 ]
링컨이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여성은 그가 1835년에 뉴 살렘에서 만난 앤 루트리지이었다. 두 사람은 사귀었으나 정식으로 약혼하지는 않았다. 앤은 L씨와의 결혼을 앞두고 이 사실을 링컨에게 알리고 싶어했지만, 8월 25일에 그녀는 장티푸스로 인해 사망하였다.[28] 1830년대 초반에 그는 여자 형제를 만나기 위해서 켄터키로부터 온 메리 오웬스를 만났다. 1836년 하반기에 링컨은 만약에 메리가 뉴 살렘으로 돌아온다면 그녀와 사귀려고 했다. 메리는 1836년 11월에 살렘으로 돌아왔고, 링컨은 한 동안 그녀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1837년 8월 16일에 링컨은 메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메리가 자신과의 관계를 끊는다고 하더라도 비난하지 않겠다고 썼다. 그녀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다.[29] 1840년에 링컨은 메리 토드와 약혼했는데, 그녀의 집안은 켄터키주 렉싱턴에서 노예를 소유한 부잣집이었다.[30] 그들은 1839년 12월에 스프링필드에서 만났고,[31] 12월 말 쯤에 약혼하였다.[32] 1841년 1월 1일에 결혼하려 했지만 그 때 두 사람은 결혼을 취소하였다.[31] 나중에 그들은 파티에서 만났고, 결국 두 사람은 1842년 11월 4일에 메리의 시집간 언니가 사는 스프링필드 저택에서 결혼하였다.[33]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링컨은 또다시 메리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였고, 그가 어디로 가려고 했었는지 물었을 때, “지옥이겠죠” 라고 대답하였다.[34]
1864년 매튜 브레디의 사진, 링컨 대통령이 어린 아들인 테드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1844년에 링컨 부부는 링컨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가까운 스프링필드에 집을 한 채 샀다.[35] 메리 토드 링컨은 집에서 부지런히 일했고, 남편이 변호사 일을 해서 벌어오는 한정된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했다.[36] 어느 날 저녁에 메리가 불을 다시 지펴야 하느냐가 네 번이나 물어 보았음에도 링컨이 책읽기에 몰두하여 대답이 없자, 그녀는 장작 조각으로 링컨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37] 로버트 토드 링컨이 1843년에 태어났고 에드워드 베이커 링컨이 1846년에 태어나면서, 링컨은 점점 수가 늘어나는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가정부에 따르면 링컨은 “특별하게 자녀들을 좋아했다고” 한다.[38] 로버트는 링컨의 자녀 중 유일하게 18살을 넘겼고, 에드워드는 아마도 폐결핵이었을 병에 걸려 1850년 2월 1일에 스프링필드에서 세상을 떠났다.[39] 자녀를 잃은 링컨의 슬픔은 윌리엄 월리스 링컨이 11개월 뒤인 이듬해 12월 21일에 태어나면서 그 정도가 완화되었지만, 윌리엄 역시 링컨이 첫 번째 대통령 임기를 수행하던 1862년 2월 20일에 11살의 나이로 워싱턴 D.C.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40] 링컨의 넷째 아들인 테드는 1853년 4월 4일에 태어났고, 대통령의 사후에도 살았지만 1871년 시카고에서 요절했다.[41] 이러한 자녀의 죽음은 링컨 부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말년에 메리는 남편과 아이들을 잃은 데서 오는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며, 로버트 링컨은 그녀를 1875년에 정신병원으로 보냈다.[42] 에이브러햄 링컨은 오늘날에는 임상 우울증이라고 불리는 우울한 상태로 인해 고통받았다.[43]
정치 활동 [ 편집 ]
정치 입문 [ 편집 ]
1832년에 일리노이주 의회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며 첫 정치 경험을 하였다. 1833년에는 관심이 있던 법률을 혼자 공부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1834년 일리노이주 주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정치계에 입문, 1846년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858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노련한 정치가 더글러스 현역 상원의원과 경쟁을 벌였다. 이때 이들의 논쟁 주제는 노예제도였는데, 당시 링컨은 분열된 집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연설로 노예 제도로 대립하던 미국인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링컨이 낙선하고 더글러스가 상원의원에 재선되었지만, 더글러스와의 논쟁 때 노예제도를 “악의 제도”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노예제도 반대론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16대 대통령 [ 편집 ]
1860년 5월 18일에 개최된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윌리엄 H 슈어드 상원의원을 제치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860년 11월 6일, 16대 미국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남부에서는 ‘노예제 반대론자’가 대통령이 된 것에 대해 위기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같은해 12월 20일, 사우스 캐롤라이나가 처음으로 연방탈퇴를 선언하였고 연이어 6개주가 다음해 1월과 2월에 연방에서 탈퇴하였다. 1861년 2월에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 7개주의 대표가 앨러배마주 몽고메리에 모여 남부연합을 결성하였다.[44] 1862년 3월 4일에 대통령에 취임한 링컨은 지속적으로 남부와 협상을 벌였으나 진전이 없었다.
남북전쟁 [ 편집 ]
1861년 4월 12일에 벌어진 섬터요새 전투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남북전쟁이 벌어졌다.[45] 1862년 9월 19일 엔티텀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리한 3일후, 링컨은 미국 노예해방 예비 선언을 발표하였다. 1863년 1월 1일에 노예해방 선언문을 공표하여 북부의 통제를 벗어난 남부지역에 대하여 전쟁중이던 1864년 선거에서 민주당 전쟁 지지세력과 힘을 모아 국민연합당을 창당하여 재선에 성공하였다. 부통령으로는 민주당 출신의 앤드루 존슨을 내세웠다. 4년간 이어진 전쟁은 1865년 4월에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가 함락되면서 사실상 종전되었다.[46]
암살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링컨 암살 사건 입니다.
1864년 유명 배우이자 남부 지지자였던 존 윌크스 부스는 링컨을 인질로 잡아 남부 포로를 석방하기 위한 계획을 짰다. 그러나 4월 11일 링컨의 흑인 투표권을 위한 연설 듣고서 몹시 화난 부스는 링컨을 암살하기로 계획을 수정한다.[47] 대통령 부부가 포드 극장에 간다는 사실을 안 부스는 공범자들과 함께 부통령 앤드루 존슨과 서기 윌리엄 H. 세이워드를 암살하기로 한다. 링컨은 경호원 워드 힐 라몬(Ward Hill Lamon) 없이 연극 《우리 미국인 사촌》(Our American Cousin)을 1865년 4월 14일 관람한다.[48]
미국 우체국 1866년 발행, 링컨 암살 1주기에, 미국 우체국은 사망한 대통령을 기리며 대통령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49] 링컨이 등장한 첫 우표.미국 우체국 1866년 발행, 링컨 암살 1주기에, 미국 우체국은 사망한 대통령을 기리며 대통령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링컨 경호원이었던 존 파커는 잠시 링컨의 마부들과 한잔 하려고 극장 옆 ‘스타 살롱’(Star Saloon)으로 나갔다. 이 때문에 대통령은 발코니 관람석에서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었다. 기회를 노리던 부스는 10시 13분에 링컨 바로 뒤에서 머리를 겨눠 치명상을 입혔다. 헨리 래스본 소령이 부스를 잠시 붙잡았지만, 부스는 그를 찌르고 탈출했다.[50][51] 10일 간 추격 끝에 부스는 워싱턴 D.C. 30마일 남쪽에 있는 버지니아의 개럿 농장(Garrett’s farm)에서 발견되었다. 오랜 싸움 끝에 부스는 4월 26일 사살당한다.[52] 군의관 찰스 리얼(Charles Leale)은 링컨의 부상을 치명상으로 진단했으며, 길 건너 양복점인 피터슨 하우스(Petersen House)로 링컨을 옮겼다. 9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링컨은 4월 15일 오전 7시 22분에 사망한다. 전쟁 서기관 스탠튼(Stanton)이 경례를 하고 “이분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근처 있던 장로교 성직자 피니어스 덴스모어 걸리(Phineas Densmore Gurley)목사가 임종 기도를 올렸다.[53] 비 내리는 동안 성조기에 싸인 링컨의 시신은 장교들이 예를 갖추어 백악관으로 옮겼으며, 도시 교회에서 조종을 울렸다. 암살 이후 부통령 앤드루 존슨이 제17대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며, 다음날 오전 10시에 대통령 선서를 했다. 링컨의 시신은 기차로 워싱턴에서 고향인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로 옮겨진 후에 오크리지 묘지에 안장되었다.[54] 뜻밖에도 링컨이 암살된 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성 금요일이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링컨에게서 워싱턴과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느낀다고 말한다.
노예 제도에 대한 견해 [ 편집 ]
일부 기독교인은 링컨이 노예 제도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보아 반대했다고 인식하고 있으나, 일각에선 링컨의 주된 관심사는 노예 제도 자체나 노예제의 폐지가 아니라 노예제의 존폐 문제를 두고 서로 대립하던 미국 북부와 남부의 분리를 막아 미 연방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55] 다만 이는 학자간에도 견해차는 좀 있다. 하여튼 링컨은 노예제를 ‘악의 제도’라고 할만큼 악습으로 규정한건 사실이고, 링컨이 대통령이 되고 남북전쟁 와중 노예 해방 선언과 미국 수정 헌법 제13조가 통과되는 등 미국 정부는 노예 출신 흑인들에게 자유를 주게 된다. 그리고 수정헌법 제13조가 통과되고 얼마 안가 링컨은 암살당한다.
경제학자 토머스 딜로렌조는 저서 《링컨의 진실 – 패권주의, 위대한 해방자의 정치적 초상》에서 링컨의 연설문, 군 지휘관들에게 보내는 서한 등 1차 문헌을 참고자료로 인용하여, 링컨은 단 한 번도 흑인 노예를 변호한 적이 없고, 노예 해방 선언은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도구이며, 남북전쟁 당시 조직적 파괴, 자신을 비판한 언론 탄압, 인신 보호 영장 정지 등으로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한 점을 들어 링컨을 “정략적 독재자”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미국 중앙정부의 비대화, 로비의 횡행, 정경유착형 엽관제를 불러왔다고도 비판했다. 물론 이에 반론하는 사람들은 그럼 노예해방선언 등 링컨이 행한건 뭐냐며, 신격화되지 않은 현실정치가 링컨을 다른 각도로 조명하는건 좋지만 또 다른 면과 당대 시대상도 고려해야 된다고 말한다.
한편, 남부 노예주의 흑인들은 자유인이 되었으나 파란만장한 삶만 있는 건 아니었다. 생계 문제는 고스란히 남았기 때문에 옛 상전 밑에서 농장 노동자로 다시 종속되기도 했고, 노예 제도의 폐지 후에도 흑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차별은 계속되었고, 백인우월주의를 주장하는 KKK 등 테러 단체까지 등장하였다. 그래도 공화당 급진파가 정국을 이끌던 시절엔 남부 의회에도 흑인이 진출하는 등 제법 성과를 냈으나, 이들이 해체되면서 남부의 흑인 인권은 노예제만 폐지된채로 실질적인 차별은 존재하는 형태가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 지속된다.
사생활 [ 편집 ]
링컨은 농담을 잘하는 쾌활한 성격이었지만 모친과 누나의 요절, 우체국장 시절 사귀던 애인을 잃은 기억 때문에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재임 중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구나 링컨은 메리 토드와 연애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문화 갈등(=컬처 쇼크)을 겪었다. 물론 링컨은 친절한 남편이자 네 아이의 아버지였다고 전해지지만, 메리와의 성장 환경 차이는 극복하기 힘들었다. 메리는 명문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예의범절이 몸에 배었고, 소작인의 아들인 링컨은 자유분방하게 자랐기 때문에 벽에 발을 올려놓고 책을 읽는 등 제멋대로 행동했다. 이러한 차이는 이들 부부가 갈등을 겪게 했다. 소수의 사람들은 토드가 악처였다고도 얘기했지만, 넓은 의미에서 그의 결혼 생활은 그럭저럭 행복했다고 전해진다. 뉴스위크 한국어판 보도에 따르면 1960년대에 한 내과 의사는 그가 마르팡 증후군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냈다. 링컨은 키가 매우 크고 사지가 길었는데 이는 마르팡 증후군의 특징이며, 이 증후군을 가진 소년이 링컨의 먼 친척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링컨의 DNA는 현재 남아 있지만, 그가 이 유전질환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링컨의 일생에 대한 사료(史料)로는 어머니 낸시의 사촌인 드니스 행크스의 증언[56]과 변호사 시절 같이 활동한 윌리엄 헌돈 변호사의 전기가 있다. 링컨의 친구이자 법적인 동료였던 헌돈은 링컨이 1835년과 1836년간에 매독에 걸렸다는 말을 자신에게 했다고 주장했다. 헌돈은 링컨의 아내 역시 링컨에게서 매독이 옮았을 것으로 추측했고, 그의 세 자녀가 유아 사망에 희생된 이유도 매독과 관련있을 것으로 예상했다.[57]
링컨은 힘이 장사였으며 특히 물건을 들어올리는 힘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래서 프로레슬링이 처음 생겨날 당시 프로레슬러로 연명한 적이 있었으며 맞붙는 상대마다 번쩍 들어서 집어던져서 상당히 강한 선수였다. 12년 동안 그 많은 싸움에서 단 1번밖에 패하지 않았다. 또한 링컨은 이 괴력 덕분에 싸움을 매우 잘했는데 ‘클래리즈 그로브 녀석들’이라는 폭력조직의 두목인 ‘잭 암스트롱’과 싸움이 붙었는데 링컨은 아주 간단하게 잭 암스트롱을 하늘 높이 번쩍 들어올리더니 약 3m가량 되는 높이에서 떨어뜨려서 쓰러뜨렸다. 잭 암스트롱은 링컨에게 패배한 후 링컨과 절친이 되었다.
노예해방선언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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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이 노예해방 선언 초판을 내각들에게 발표하는 그림. Carpenter. 1864년 그림.
링컨은 자신이 노예 제도를 없애기 위한 힘이 헌법에 의해 제한받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링컨은 새로운 미국 영토로 노예제 도입을 막는 것이 완벽한 노예제 폐지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또한, 각 주에 노예 소유주들에게 노예 해방에 대한 대가로 보상금을 지급하여 노예 제도를 축소할 경제적 유인책을 펴도록 설득했다. 링컨은 이 방식이 경제적으로도 노예제도를 없애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았으며, 이것이 미합중국 개국 정신에 부합한다고 보았다.[58] 하지만 1861년과 1862년의 노예 해방 시도는 반대했었는데, 이 선언으로 북부와 남부 경계 주의 반발을 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59]
1862년 7월, 의회에서 남북전쟁에 가담한 자들의 노예를 강제 해방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링컨은 의회 권력으로 이를 실현하는게 불가능하며, 전쟁 사령관 직권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보았지만, 이 법안을 승인했다. 그 달,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의 첫 판을 내각들에게 발표했다. 이 안에 그는 “정당하고, 필요한 군사 조치로서, 1863년 1월 이후부터, 남부에서 노예로 잡혀있는 모든 사람을 영구히 해방시킨다.”라고 적고 있다.[60]
1862년 9월 19일에 엔티텀 전투에 북부군이 승리하자 3일후 링컨은 ‘노예 해방 예비 선언’을 공표하였다.[61][62] 이어서 1863년 1월 1일에 〈노예 해방 선언문〉에 서명한후, 북부의 통제 하에 들어있지 않은 여러주들의 모든 노예를 즉시 해방하라고 선언했다. 노예 제도 폐지가 군사적 목표로 설정되어, 북군이 남으로 진주하면서 해방된 노예가 3백만에 육박했다.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 선언하며 “나는 내 삶에서 내가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을, 내가 여기 서명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 느껴본 적이 없다” 고 첨언했다.[63] 노예 해방 선언이 발표된 후 13 명의 공화당 주지사가 전쟁 주지사 회의에서 만나,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을 지지하되, 조지 B. 매클렐런 장군을 북군 사령관에 넣지 않도록 하는 것을 권고했다.[64]
노예 해방 선언 이후 해방된 노예를 소집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링컨은 이 정책을 처음에 완전히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을 표했지만, 1863년 봄, 그는 “대대적인 흑인 모병” 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다. 테네시주의 주지사 앤드류 존슨에게 쓴 흑인 군대 소집을 권하는 편지에서 링컨은 “5만 명에 달하는 무장하고, 훈련받은 흑인 병사들이 미시시피강변에서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반란은 끝날 것입니다” 고 쓰고 있다.[65] 1863년 말, 링컨의 지시에 따라 로렌조 토머스 장군은 20개 연대에 달하는 흑인들을 미시시피 강변에서 소집했다.[66]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링컨을 “처음으로 미국에서 내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려고 하지 않은 위대한 사람”으로 평했다.[67]
게티즈버그 연설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게티즈버그 연설 입니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난 후, 링컨이 전투 격전지에서 발표한 선언문으로, 짧은 문장 속에 민주주의의 이념을 잘 요약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연설의 가장 유명한 대목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은 사실 링컨이 먼저 한 말이 아니라 영국의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가 먼저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후 한 말인 “이 성경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통치를 위한 것 입니다.”를 링컨이 인용한 것이다. [68]
가족 [ 편집 ]
역대 선거 결과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주요 문헌
일반 문헌
Angle, Paul McClelland; Earl Schenck Miers, ed (1992) The Living Lincoln: the Man, his Mind, his Times, and the War He Fought, Reconstructed from his Own Writings, Barnes & Noble Publishing, ISBN 978-1-56619-043-5
Burkhimer, Michael. (2003) One Hundred Essential Lincoln Books, Turner Publishing Co., ISBN 1-58182-369-X
ISBN 1-58182-369-X Emerson, James ( 2007) The Madness of Mary Lincoln,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ISBN 978-0-8093-2771-3
ISBN 978-0-8093-2771-3 Fehrenbacher, Don E. (1989) Lincoln: Speeches and Writings 1859–1865, Library of America, ISBN 0-940450-63-1
ISBN 0-940450-63-1 Holzer, Harold; Medford, Edna Greene; Williams, Frank J. (2006)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Three Views (Social, Political, Iconographic), Louisiana State University Press, ISBN 978-0-8071-3144-2
ISBN 978-0-8071-3144-2 McPherson, James M. (1992) Abraham Lincoln and the Second American Revolution,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507606-6
ISBN 978-0-19-507606-6 McPherson, James M. (2007) Drawn With the Sword: Reflections on the American Civil War,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511796-7
ISBN 978-0-19-511796-7 McPherson, James M. (2008) Tried by War: Abraham Lincoln as Commander in Chief, Penguin Press, ISBN 978-1-59420-191-2
ISBN 978-1-59420-191-2 Zarefsky, David S. (1993) Lincoln, Douglas, and Slavery: In the Crucible of Public Debat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ISBN 978-0-226-97876-5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사건
링컨 암살 사건은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난 지 5일 후인 1865년 4월 14일 금요일(성금요일[1]) 오후 10시경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포드 극장에서 남부 지지자 가톨릭 교도인 존 윌크스 부스 일당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포드 극장에서 아내 메리 토드 링컨 등과 《우리 미국인 사촌》(Our American Cousin)의 공연 중에 존 윌크스 부스에 의해 저격을 당했다. 링컨은 다음날 아침, 1865년 4월 15일 토요일 오전 7시 22분에 윌리엄 피터슨(William Petersen) 집에서 사망했다.
링컨을 살해한 부스는 배우 출신으로 남부맹방의 지지자였다. 부스의 공범은 루이스 파월(Lewis Powell)과 데이빗 헤럴드(David Herold)로 그들에게 국무부 장관 윌리엄 수어드의 암살도 명령했다. 부스의 목적은 링컨, 수어드, 부통령 앤드류 존슨을 암살하여 워싱턴을 혼란에 빠뜨리고, 미국 정부(북부 연방)를 전복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부스는 링컨 암살에 성공했지만, 정부 흔들기는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 수어드는 부상당했지만 생명을 건졌고, 존슨의 암살을 명령받았던 조지 애체롯은 암살을 단행할 담력이 없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워싱턴을 떠났다.
최초의 계획 [ 편집 ]
부스는 원래 링컨을 납치해 남부로 옮기고, 북군 정부의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어있는 남군 포로를 해방시켜 달라고 협박할 작정이었다. 부스는 이 계획을 위해 동지를 모았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새뮤얼 아놀드, 조지 애체롯, 데이빗 헤럴드, 마이클 오래플린, 루이스 파월, 존 수랏 등이었다. 그 무렵 수랏의 어머니 매리 수랏(Mary Surratt)은 메릴랜드 수랏츠빌(Surrattsville)에 있던 하숙집을 나와서 워싱턴에 거주지를 옮기고 있었다. 워싱턴 수랏의 집을 부스가 자주 방문하면서 매리 수랏은 부스에게 아지트를 제공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옮겼다고 성토하게 된다.
1860년 말, 부스는 볼티모어에서 친남부맹방 단체 ‘골든 서클 기사단’(Knights of the Golden Circle, KGC) 활동을 시작하였다.[2]
1865년 3월 4일에 열린 링컨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취임식에 부스도 게스트로 참가했다. 부스가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연인 루시 헤일 덕분이었다. (루시의 아버지 존 헤일은 이후 스페인 공사가 된 인물이었다). 부스는 이후 “그 취임식 날이라면, 링컨을 죽일 수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었다.
1865년 3월 17일, 부스는 동료들에게 링컨이 캠벨 육군 병원에서 톰 테일러의 연극 《고요한 물이 깊이 흐른다》(Still Waters Run Deep)를 감상할 예정임을 알렸다. 부스는 동료와 함께 워싱턴 외곽에 있는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병원에서 돌아가는 링컨을 매복을 하여 납치하려 했다. 그러나 링컨은 병원으로 가지 않고, ‘내셔널 호텔’(National Hotel)에서 제142 인디애나 연대가 획득한 남군의 군기를 주지사 올리버 모튼에게 수여하는 행사에 참여하여 연설을 했다.[3]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은 부스 일행이 묵고 있던 호텔이었다.[4][5]
그러는 동안, 남부군은 괴멸 직전이었다. 1865년 4월 3일 남군의 수도인 버지니아의 리치몬드가 함락되었다. 4월 9일에는 남군의 주력군인 로버트 E. 리 장군이 이끄는 북버지니아 군이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에서 북군 소속의 포토맥 군에게 항복했고, 그 시점에서 이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남군 대통령인 제퍼슨 데이비스와 정부 관료들은 모두 도주를 했다. 많은 남부인들이 희망을 버리고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스는 그의 행위에 대한 믿음을 지속했다.[6]
4월 11일, 리의 군대가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한 이틀 후, 부스는 노예들에게 공민권을 부여하자는 생각을 지지하는 링컨의 백악관 연설에 참석했다. 격하게 분노한 부스는 암살을 결심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 그것은 깜둥이 시민을 의미한다. 이제는 신에게 맹세코, 그를 끝장내고 말리라. 이것이 그가 한 마지막 연설이 될 것이다.[7] ”
암살 [ 편집 ]
링컨을 암살할 때 사용되었던 데린저 , 현재는 포드 극장 국립 사적지에 장식되어 있다.
사전 모의 [ 편집 ]
부스가 링컨 납치 계획을 포기했을 무렵, 남부맹방은 이미 붕괴 직전이었다. 동부의 주력이었던 북버지니아 군은 이미 항복했고, 서부에서는 조셉 존스턴 장군이 이끄는 테네시 군이 아직 존재하고 있었지만 윌리엄 셔먼 장군이 이끄는 북군에게 맹추격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전선에서 남군의 패색은 짙어졌고 많은 남부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있었지만, 부스는 아직도 남부는 지속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 결의를 일기에 적고 있었다.[8][9] 부스는 링컨과 부통령 앤드류 존슨, 국무부 장관 윌리엄 H. 수어드의 암살에 성공하면 미합중국 정부는 혼란에 빠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시 남부맹방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애체롯 자신은 암살에 가담하고 싶지 않아서 납치에 동참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부스는 애체롯에게 이제는 늦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스도 애체롯이 암살을 수행하기 힘들다고 보았고, 포드 극장으로 향하는 도중의 부통령 존슨의 저택 앞에서 애체롯를 내려주고는 메모를 작성하여 부통령에게 전달하도록 명령했다. 메모에는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댁에 계십니까?”라고 쓰여져 있었다.[10] 이 메모의 의미를 둘러싸고 다양한 추측이 있었지만[11], 가장 정확도가 높다고 여겨지는 설은 부스가 애체롯에게 암살은 무리라고 보고 나중에 존슨도 공범이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는 공작을 했다는 것이다.[12] 부스는 이어 파월에게 수어드를 암살하도록 파견하고, 해럴드는 수어드의 안내를 시켜 대기시켰다.[13]
암살 당일 [ 편집 ]
4월 14일, 부스의 아침은 자정의 손놀림으로 시작되었다. 내셔널 호텔의 침대에 누워 그는 모친에게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 서두르고 있다고 편지를 섰다. 그의 일기에서, “우리의 원동력은 거의 상실되었으며, 뭔가 단호하고, 거대한 것이 실행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6][14]
링컨의 하루는 상쾌하게 시작되었다. 휴 맥클로치 신임 재무부 장관이 그날 아침 “나는 대통령이 그렇게 활기차고, 행복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발언을 할 정도였다. 모두가 그러한 변화를 알아챌 정도였다. 여러 달 동안, 대통령은 창백했고, 초췌해 있었다. 링컨 자신도 사람들에게 정말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변화는 영부인 매리 토드 링컨에게 여러 가지 걱정을 끼쳤다. 왜냐하면 링컨이 그렇게 대놓고 말한다면, 불운을 가져온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링컨은 그녀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기 않았다. 당일 그는 각료들을 만난 후 부통령 앤드류 존슨과 짧은 회의를 했다. 이것은 6주전 부통령 취임식 선서 이후 둘 사이의 최초의 회의였다.
정오에 포드 극장에서 편지를 가져가는 동안(부스는 그곳에 영구 사서함이 있었다), 부스는 극장주인 존 포드의 형제로부터 그날 밤 대통령과 그랜트 장군이 우리 미국인 사촌을 보기 위해 방문한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부스는 이번 기회가 뭔가 ‘단호한’ 것을 이룰 수 있는 완벽한 기회라고 생각했다.[14] 그는 여러 번 사전조사를 끝냈기 때문에 극장의 지리를 파악했다.[15][16]
같은 날 오후, 부스는 워싱턴 D.C.에 있는 매리 수랏트의 하숙집으로 가서, 메릴랜드 수랏츠빌에 있는 그녀의 술집에 소포를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수라트에게 그곳의 세입자에게 미리 술집에 준비해 두었던 총과 탄환을 그날 저녁에 가져갈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17] 엄마를 지녀의 하숙생이자 아들의 친구인 루이스 J. 위츠만과 함께 길을 떠났다. 이러한 그녀의 결정은 3개월 후 그녀의 처형으로 직결되었다.
그날 밤 저녁 7시, 존 윌크스 부스는 마지막으로 공범들과 최후의 모임을 가졌다. 부스는 루이스 파월에게 윌리엄 H. 수어드 국무부 장관을 저택에서 암살하라고 할당하고, 조지 애체롯에게는 부통령 앤드류 존슨을 저택에서, 그리고 데이빗 E. 헤롤드에게는 파월을 수어드의 집으로 안내하고, 워싱턴을 빠져나와 메릴랜드에서 부스를 만나기로 임무를 주었다. 부스는 포드 극장에서 링컨을 데링거 단발총으로 암살하고, 그랜트를 칼로 살해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계획들은 밤 10시의 종이 울린 직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시킬 예정이었다.[18] 애체롯은 살해가 아니라, 단지 납치계획에만 서명했다고 발뺌을 했지만, 부스는 그에게 이미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 있다고 말했다.[19]
암살 실행 [ 편집 ]
링컨이 암살당한 포드 극장의 대통령석
부스가 들은 정보와는 달리, 그랜트 장군 부부는 연극 관람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영부인과 그랜트 부인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20] 링컨 부부는 남북 전쟁에 의한 공적인 스트레스와 1862년에 아들이 죽은 것으로 인한 사적인 스트레스를 안고 있었다. 극을 보고 정신적으로 긴장을 풀고 싶었던 링컨 부부는 여러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모두 거절했고 결국 헨리 래스본 소령과 그의 약혼녀 클라라 해리스(뉴욕 상원의원 이라 해리스의 딸)만 초대를 수락하였다.[21]
부스나 공범인 마이클 오래플린이 그랜트 부부를 따라 그날 오후 늦게까지 유니언 역을 따라가서는 그날 밤 그랜트가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음을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 확실히 오래플린은 그랜트를 암살하기 위해 그랜트 부부가 탑승한 필라델피아행 기차를 탔다. 그날 저녁 의문의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랜트 부부가 탑승한 개인차가 잠겨져 있었고, 짐꾼에 둘러쌓여 있었기 때문에, 저격은 실패로 돌아갔다.[22]
링컨 일행은 늦게 도착하여, 대통령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2개의 벽으로 막힌 코너석의 벽을 없애 하나로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포드 극장에서는 미국 최고의 비극 배우로 평가받고 있는 에드윈 부스가 연기하는 《우리 미국인 사촌》이 공연되고 있었다. 연극이 잠시 중단되고, 오케스트라가 대통령 공식 환영곡인 ‘헤일 투 치프’(Hail to the Chief)를 연주했고, 관객은 대통령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포드 극장은 1,700명의 관객으로 꽉 채워진 상태였다.[23] 영부인은 손을 잡고 있는 대통령에게 속삭였다. “그렇게 잡고 있으면 해리스 양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아무 생각없겠지!”라고 대통령은 답했다.[24] 그 말이 링컨 대통령이 한 최후의 단어가 되었고, 그때가 밤 10시 15분이었다.
이 대통령 관람석은 원래 존 프레드릭 파커라는 경찰관 한 명이 지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경비원으로는 결단코 의심스런 선택이었다.[25] 막간을 이용하여 파커는 링컨의 하인과 마부를 데리고 근처의 술집에 들렀다. 그가 극장으로 돌아왔는 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부스가 대통령석에 침입했을 때 그는 확실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다.[26]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경찰관 한 명이 참석하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존 윌크스 부스와 같은 정상급 배우가 대통령석에 입장하는 것을 거부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았다. 부스의 유명인사 지위가 그의 접근 허용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4월 14일 몬토크 호를 방문할 때 탑승하고 있었던 해군 외과의 찰스 브레이너드 토드 박사도 그날 저녁 포드 극장에 참석하고 있었고, 그가 목격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27]
“ 밤 10시 25분경, 경찰관 한 명이 들어와서는 천천히 대통령석으로 걸어들어갔으며, 나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다. “저기 부스가 있군!” 그래서 나는 고개를 돌려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천천히 걷고 있었고, 멈췄을 때 대통령 관람석 문 가까이에 접근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서 그 위로 뭔가를 적고 있었다. 그리고 수위에게 줘서 우편함에 넣게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그는 걸어들어 갔다. ”
대통령석으로 통하는 첫 번째 문에 접근을 하자마자, 부스는 안에서 나무 지팡이로 잠금열쇠를 걸고, 문과 벽사이의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두 번째 문에 뚫어놓은 작은 틈을 통해 안을 엿보았다.[28]
포드 극장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필라델피아 데린저 권총, 이 총에 링컨이 암살당했다.
링컨은 앞으로 기대어, 누군가를 알아본 것처럼 관객석의 왼쪽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29] 이제 3막, 2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비록 연극 자체를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부스는 그 연극을 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배우인 해리 호크(사촌 아사 트렌차드 역을 연기하는)가 가장 재미있는 대사로 여겨지는 독백을 하러 혼자서 무대에 올라오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스는 관중들의 열광적인 박수소리에 총소리를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무대에서 아사(호크)는 최근에 떠나간 마운트체스팅턴 부인에 응답을 독백을 하였다. “상류사회의 매너를 몰랐나요? 글쎄요, 그는 당신의 오래된 내면을 끄집어 낼만큼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되는데요. 노부인. 이 교활한 할망구야!” 관객들로부터 웃음이 터져나왔고, 부스는 문을 열고, 앞으로 기어가서 대통령의 뒷머리를 탄도거리에서 저격했다.[30] 링컨은 즉각 팔걸이 의자에 꼬꾸라졌고 치명상을 입었다. 영부인 매리가 손을 뻗어 그를 잡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를 알았을 때 비명을 질렀다.
총소리를 듣자마자, 래스본은 재빨리 그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스가 도주하려고 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부스는 권총을 던져버리고, 칼을 꺼내들어 왼팔을 격하게 찔렀다. 래스본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 잡고, 대통령석 난간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부스를 붙잡으려 했다. 부스는 다시 래스본의 가슴을 찌르고는 대통령석 난간에서 무대 아래로 뛰어내렸다.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극의 일부인양 무대를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피묻은 칼을 머리 위로 꺼내보이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시크 셈페르 타라니스!(Sic semper tyrannis)”[31] 이 말은 버지니아주의 모토이기도 했으며, “영원한 폭군이여!”라는 라틴어이며, “남부는 복수했다”를 뜻하는 말이었다.[32]
매리 링컨과 클라라 해리스는 비명을 질렀으며, 래스본의 “저 놈 잡아!”[33] 라는 외침은 관객들에게 부스의 행동이 쇼가 아님을 자각하게 했으며, 곧 대혼란이 발생했다. 부스는 래스본이 소리치는 순간 무대를 가로질러 누군가가 오기도 전에 도주를 감행했다. 그는 바깥 옆 문에 대기시켜 놓은 말을 향해 달려나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알아챈 관객 중 일부가 그를 쫓아갔지만, 잡지는 못했다. 부스는 말을 잡고 있던 피너츠 버로우즈의 이마를 칼손잡이로 가격하고, 말에 뛰어 올라서 버로우즈의 가슴을 세게 차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국무장관은 암살을 면했지만 링컨은 다음날 아침 7시 조금 넘어 죽었다. 12일 뒤 연방군이 라파하노크 강 바로 남쪽에 있는 버지니아의 한 농장 담배창고에 부스라는 사람이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곳으로 출동했다. 창고에 불을 지른 뒤 그 남자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자살을 했는지 병사의 총에 맞아 죽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시체는 워싱턴으로 운반되었으며 친지들이 신원을 확인했다. 그러나 시체가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신원을 분명히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부스인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부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조직이 암살계획을 꾸몄을 것이라는 소문도 분분했지만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다.
링컨 대통령의 죽음 [ 편집 ]
1865년 포드 극장
찰스 릴은 외과 군의관으로 그날 밤 당직이 없어서, 그 연극을 관람하고 있다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부스가 관객들에게 연기를 할 때, 부스의 칼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서 사람들을 가로 질러 대통령 관람석 뒷문으로 들어갔다. 문은 열리지 않았고, 마침내 래스본은 문에 새겨진 자국과 문이 안 열리도록 빗장이 채워진 것을 보았다. 래스본은 릴에게 소리쳤고, 래스본에게 빗장을 제거해서 문을 열도록 했다.[34]
릴이 박스에 들어서자 가슴과 팔의 자상으로 깊게 찔려 왼쪽 팔위로 피를 심하게 흘리는 래스본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래스본을 지나쳐 의자에 쓰러져, 흐느끼면서, 어쩔 줄 모르는 매리에게 안겨 있는 링컨 대통령을 찾아 앞으로 나갔다. 릴은 링컨이 마비되어, 좀처럼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릴은 링컨 대통령이 어깨에 칼을 찔렸다고 생각하고서는 바닥에 눕혔다. 관객석에서 두 번째 의사인, 찰스 새빈 태프트가 무대에서 통째로 들어올려져 난간을 타고, 박스로 들어왔다.
토드도 당시 관중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박스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라는 외침이 커졌다. 나는 그러한 광경을 전에 본 적이 없었다. ”
태프트와 릴은 링컨의 피묻은 칼라를 도려내고, 셔츠를 벗겼다. 릴은 손으로 더듬어 왼쪽 귀 바로 옆의 머리 뒤쪽에 총탄 자국을 발견했다. 릴은 총탄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총탄이 너무 머리 깊은 곳에 박혀 있어서, 대신 상처에서 핏덩어리를 제거했다. 결과적으로 링컨의 호흡이 나아졌다.[35] 릴은 얼마간 피를 계속 흘려보낸다면 링컨이 여전히 호흡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릴은 총알이 링컨의 두개골로 들어가 두개골 부분을 심하게 골절시킨 것을 알게되었으며, 뇌의 왼쪽에서 파고들어 머리의 반대편인 오른쪽 눈 부위에 박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릴은 마침내 어쩔 도리가 없다고 알렸다. “치명상입니다. 회복불능이예요.”[36]
토드는 암살 소식이 거리에 피지자, “군인, 선인, 경찰 너나할 것 없이 사방으로 찾았지만, 범인은 사라진 뒤였다. 어떤 장군은 나에게 쪽지를 건네 가장 가까운 전신국으로 가서 전국에 알리게 했다고 보도했다. 다는 전속력으로 달려가서, 10분이 지나서 그 슬픈 뉴스는 전국에 도달했다”고 보고했다.
(하퍼스 위클리, 1865년 5월 6일자) 침대에 누워 죽은 링컨 대통령
릴과 태프트 그리고 관중석에서 찾아 온 또 다른 의사 앨버트 킹은 재빨리 상의를 하고 이동시켜야 하지만, 덜컹거리는 마차를 타고, 타운에서 백악관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옆 건물에 있는 피터 탈타불의 스타 살롱을 짧게 고려한 후에, 그들은 길 건너 편에서 옮길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 세 사람의 의사와 관객으로 와 있던 군인 몇 명이 대통령을 포드 극장의 정문으로 운반하여 이동시켰다. 길 건너 편에 한 남성이 등불을 들고서, 외치고 있었다. “이쪽이요! 여기로 데려오세요!”그 사람은 포드 극장 맞은 편에 윌리엄 피터슨의 하숙집에 하숙을 하고 있던 헨리 새포드였으며, 거리의 소요에 놀란 사람이었다.[37] 여러 사람이 링컨을 하숙집으로 운반해 왔으며, 1층의 침실로 데려가 침대가 작아서 꼭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대각선으로 눕혔다.[38]
피터슨 하우스에서 경계가 시작되었다. 미합중국 군의관 장군에 의해 조셉 K. 반즈, 찰스 헨리 크레인, 앤더슨 루핀 애벗과 로버트 K. 스톤 3명의 내과 의사들이 합류했다. 크레인은 소령으로 반즈의 조수였다. 스톤은 링컨의 개인 의사였다. 그로버 극장에서 《알라딘과 요술 램프》를 보고 있던 넷째 아들 토드 링컨은 연극 관람 도중 링컨 대통령의 암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연극이 중단되었을 때 극장에 있었지만, 피터슨 하우스에 입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해군 장관 기드온 웰즈와 전쟁부 장관 에드윈 M. 스탠턴이 와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매리 링컨은 암살의 경험에 어쩔 줄 몰라 정신을 놓고 있었고, 스탠턴은 “저 여자 좀 데리고 나가서 다시는 못들어 오게 해!”라고 소리치며 그녀를 방에서 내보내라고 명령했다. 매리 링컨이 앞 객실에 흐느껴 울고 있는 동안, 스탠턴은 뒷 방에서 일을 시작했다. 몇 시간동안 정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면서 전보를 주고받고, 목격자들로부터 보고서를 작성하고, 부스를 추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39]
1865년 4월 15일 아침 7:22에 결국 링컨은 뇌에 입은 총상으로 사망을 했다.[40] 그의 나이 56세였으며, 매리 링컨과 자식들은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침대 주위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기도가 끝나자, 스탠턴이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의 정확한 내용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마다 이견이 있었지만, 모두 동의를 하는 부분은 “이제 그분은 …에 속하게 되었으며…”로 시작하여 어떤 학자들은 ages로 끝났다고 주장하고, 다른 학자는 angels로 끝났다고 한다.[10][41] 링컨의 유해가 치워진 직후 군 의학 삽화가 허만 페이버가 방으로 와서 문서로 그 장면을 남길 수 있었다.[42]
비록 일부 전문가들은 동의를 하지 않지만,[40] 그 당시에 비해 릴 박사의 치료는 훌륭했다고 여긴다.[43] 그는 장례식동안 여러 가지 다양한 일에 참여함으로써 대통령을 구하려 했던 그의 노력이 인정받고 있다. [44]
윌리엄 수어드 장관을 습격하는 파월 [ 편집 ]
부스는 루위스 파월에게 국무부 장관 윌리엄 H. 수어드를 암살하라고맡겼다. 4월 5일, 수어드는 마차에서 떨어져 골절에, 턱뼈가 두 군데 부러지고, 오른팔이 부러졌다. 의사는 턱을 고치기 위해 턱부목으로 임시처방했다(흔히 목 부목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암살이 일어나던 저녁에, 그는 여전히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라파예트 공원 내 워싱턴의 집에서 꼼짝 못하고 있었다. 헤롤드는 파월을 수어드의 집으로 안내했다. 파월은 1858년형 휘트니 리볼버를 휴대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크고, 무거우며, 남북전쟁 동안 인기있었던 총이었다. 게다가 그는 은손잡이로 된 보위 나이프도 챙겨왔다.
파월은 밤 10시 약간 지난 시간에 그 집의 정문에 노크를 했다. 수어드의 집사인 윌리엄 벨이 나가 맞이했다. 파월은 벨에게 담당의사 버디 박사님이 준 약을 가져왔으며, 직접 전달해서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할 지 가르쳐 준다고 말했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파월은 그의 역할을 장황한 설명을 하며 수어드가 있는 3층 침실로 바로 올라가기 시작했다.[45][46][47] 계단 꼭대기에서 그는 수어드의 아들이자 차관보인 프레드릭 W. 수어드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 파월은 윌리엄에게 했던 똑같은 말을 했다. 프레드릭은 침입자를 의심하여, 부친이 자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파월은 그에게 칼을 꺼내 찔렀고, 집사인 윌리엄 버틀러는 도망가기 전에 살인자다! 살인자다!라고 외쳤다.
1861년 윌리엄과 파니 수어드
복도에서 목소리를 듣고, 수어드의 딸 파니는 수어드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말했다. “프레드, 아빠가 지금 깨시잖니”, 그리고 문을 닫았다. 그리하여 파월에게 수어드의 위치를 발각되게 되었다. 처음에는 놀라서 파월은 계단을 뒤돌아 내려가다가 권총을 꺼내 프레드릭의 이마를 겨냥했다. 방아쇠를 당겼지만 잘못 발사되었다. 다시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파월은 패닉을 공황에 빠뜨리고, 머리 부위를 권총으로 강타했다. 수어드는 계단에 굴러 떨어져 의식불명이 되었지만, 그의 총도 수리가 불가능게 파손되었다. 파니는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것이 궁금해 하며 문 밖을 다시 내다보았다. 그녀는 동생이 피투성이에, 의식없이 마루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고, 그녀를 향해 파월이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파월은 그녀를 한쪽으로 밀치고, 수워드의 침실로 달려가서, 얼굴과 목을 반복해서 찔렀다. 첫 번째 아래로 찌른 것은 엉뚱한 곳을 찔렀지만, 세 번째 찌른 것은 수어드의 뺨을 갈라놨다.[48] 수어드의 턱보호대가 경정맥으로 파고드는 칼날을 막아주는 유일한 물건이었다.[49]
로빈슨 병장과 수어드의 아들 어거스터스는 파월을 쫓아내려 했다. 어거스터스는 방에서 자고 있었지만, 파니의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집 밖에서 데이빗 헤럴드도 파니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는 겁이 나서 수도의 탈출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파월을 내버려두고 도망쳤다.[50] 파월이 가격한 힘으로 수어드 장관은 침대에서 내동댕이쳐져 파월이 닫지 않는 침실 뒤의 마루로 떨어졌다. 파월은 로빈슨과 어거스터스 그리고 파니와 싸웠으며 그들도 찔렀다.
어거스터스가 권총을 가지고 오자, 파월은 계단 아래로 내달려,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51] 바로 그때 에머릭 한셀이라는 전령이 수어드에게 온 전보를 가지고 도착했다. 파월은 한셀의 등을 찔러 그를 바닥에 쓰러뜨렸고, 한셀은 평생 마비된 채 불구가 되었다. 밖으로 뛰쳐나가기 전에 파월은 소치쳤다. “나는 미쳤어! 내가 미쳤어!” 헤럴드가 남겨 둔 말을 나무에서 풀고는 혼자서 도주를 했다.
워싱턴 메트로폴리탄 경찰국 암살 일지 목록
파니는 울부짖었다. “세상에! 아빠가 돌아가셨어!” 로빈슨 병장은 장관을 바닥에서 들어 침대에 눕혔다. 수어드는 입에서 피를 뱉어내고는 말했다. “나 안 죽었다. 의사와 경찰을 보내고, 집 문을 닫아라”[52] 수어드는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어두운 방에서 파월의 거친 칼질은 그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고, 결국은 회복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영구히 흉터가 남게 되었다.
애체롯의 앤드류 존슨 암살 실패 [ 편집 ]
부스는 조지 애체롯에게 워싱턴 쿼크우드 하우스에서 머물고 있는 부통령 앤드루 존슨의 암살을 할당했다. 애체롯은 부통령의 방으로 밤 10시 15분에 가서 그를 저격할 예정이었다.[53] 4월 14일에 애체롯은 존슨이 머물고 있는 바로 윗방인 쿼크우드 126호실을 빌렸다. 그는 쿼크우드에 정해진 시간에 도착했고, 개인 총과 칼을 가지고 아래 층의 바로 내려왔다. 애체롯은 바텐터 마이클 헨리에게 부통령의 성격과 행동에 대해서 물었다. 호텔 살로에서 시간을 얼마간 보낸 뒤, 애체롯은 술에 취해서 워싱턴 거리를 배회하고 다녔다. 신경이 곤두선 채로 거는 거리에 그의 칼을 던져버렸다. 그는 새벽 2시경에 펠실베이니아 하우스 호텔로 길을 잡아서, 그곳에서 방을 하나 잡고는 잠에 빠졌다.[54][55]
그날 일찍, 부스는 쿼크우드 하우스를 들러서, 존슨에게 다음과 같이 적힌 쪽지를 남진다.
“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댁에 계신가요? ” — J. 윌크스 부스[45]
그 카드는 그날 밤 존슨의 개인 비서인 윌리엄 브라우닝이 읽었다.[56] 이 쪽지는 몇 년동안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57] 하나의 설은 부스가 애체롯이 존슨의 암살에 실패할까 두려워 했거나, 또는 애체롯이 암살을 할 용기가 없었을 때, 그 쪽지가 존슨이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은 암시하기 위해 남겨 둔 것이라는 것이다.[58] 또 다른 설은 부스가 실제로 존슨이 그날 밤, 쿼크우드에 머물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브라우닝과 실제로 접촉을 시고하고 있었다는 설이다.[56]
도주와 검거 [ 편집 ]
링컨 암살범들을 잡기 위해 만든 현상금 포스터, 존 수랏, 존 윌크스 부스, 데이빗 E. 헤럴드의 사진이 그려져 있다.
말을 타고 포드 극장에서 반 시간을 달린 부스는 네이비 야드 다를 건너서 시내를 빠져나와 메릴랜드로 갔다.[59] 데이빗 해럴드도 한 시간 뒤에 똑 같은 다리를 건너[60] 부스와 만났다.[61] 수랏빌에서 전에 보관해 두었던 무기와 준비물을 챙긴 후에 해럴드와 부스는 현지 의사였던 새뮤얼 A. 머드에게로 가서 부스의 부러진 다리를 치료하고 부목을 대었다. 이후 머드는 부스에게 목발 한 쌍을 만들어 주었다.[62]
머드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후에, 부스와 헤럴드는 새뮤얼 콕스의 집으로 안내해 줄 현지인을 고용했다.[63] 콕스는 다시 그들을 토마스 존스에게로 데려갔으며, 그는 부스와 헤럴드는 집 근처에 있는 제키아 늪에 그들을 5일간 숨겨 포토맥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주었다.[64] 4월 24일 오후, 그들은 담배 농사를 짓고 있는 리처드 H. 개럿의 농장에 도착했다. 부스는 개럿에게 남군 병사들에게 부상을 당했다고 말했다.
토드 박사의 형제에게 전달된 15번째 편지의 정보를 통해 부스의 소재와 상태에 관해 워싱턴 D.C.에 떠돌고 있는 소문을 알 수 있다.
“ 오늘은 온 시내가 슬픔에 잠겨 모든 집들이 암흑에 빠져 있습니다. 나는 미소를 본적도 없고, 상점도 문을 열지 않았으며, 내가 본 건장한 사내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부스가 죄수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도망쳤다고 말하지만, 여기에서 받은 명령으로 보건데, 그가 잡혔고, 그날 밤동안 안전하게 구금되어 감시받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제기한 것은 끝이 없네요.[27] ”
부스의 도주로
북군 추적자들이 부스를 뒤쫓고 있는 동안, 추적자 중 4명이 4월 24일 정찰 임무 도중 익사했다.[65] 그들의 작은 바지선 블랙 다이아몬드가 증기선인 매사추세츠 호와 라파해넉 강[66] 이나 포토맥 강에서 부딪쳤다.[67] 매사추세츠 호의 승객을 포함하여, 최근에 교대한 북군 군인과 가석방된 전 남군 포로들까지 적어도 50명이 중상을 입었다.[68]
부스와 헤럴드는 제16 뉴욕 기병대 소속의 군인들이 농장에 도착할 때까지 개럿의 농장에 4월 26일까지 머물러 있었다. 군인들이 헛간을 포위했고, 그곳에서는 부스와 헤럴드가 잠들어 있었다. 군인들은 15분이 지나면 사격을 할 것이라고 알렸다. 헤럴드는 항복을 했지만, 부스는 군인들이 항복하라고 외쳤음에도 “나는 살아서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크게 외치며[69]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말을 듣자마자, 군인들은 헛간에 사격을 가했다.[70] 부스는 한 손에 라이플을 휘두르며, 다른 한 손에는 권총을 들고서 뒷 문으로 돌진했다. 부스는 어떤 무기도 쏘지를 않았다.
보스턴 코벳이라는 병장이 헛간 뒤로 기어 가서 부스를 쏘았고, 척수를 끊었다.[71] 그의 총알이 링컨의 뇌를 관통했던 곳 아래 쪽으로 약 1인치 아래 쪽의 뒷 머리 부분이 었다.[72] 부스는 헛간의 계단 위로 운송되었다. 한 군인이 그의 입에 물을 먹여 주었고, 그는 즉시 뱉어내며 삼킬 수가 없었다. 부스가 그 군인에게 말했다. “어머니에게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전해주게!” 통증으로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 군인에게 손을 얼굴 앞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하면서 그들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소용없어… 소용이 없어.” 이것이 그가 뱉은 최후의 말이었다. 부스는 개럿 농장의 횃대 위에서 코벳에게 총을 맞은 지 두 시간만에 숨을 거두었다.[45][73]
1865년 4월 26일 부스가 죽은 개럿 농장
파월은 워싱턴 지리에 어두웠고, 데이빗 헤럴드의 안내를 받지 못하고 , 4월 17일 수랏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때까지 거리를 3일동안 헤매고 다녔다. 그는 형사들이 이미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파울은 매리 수랏에 의해 고용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했다. 결국 둘 다 체포되었다.[74]
조지 애체롯은 워싱턴에서 북서쪽으로 40 km 정도 떨어진 메릴랜드 저먼타운에 있는 농장에서 숨어 있었지만, 4월 20일 추적을 받고 체포되었다.[75] 나머지 공조자들도 퀘벡으로 도주한 존 수랏을 제외하고는 월 말까지 모두 체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톨릭 사제들에 의해 의닉되었다. 1865년 9월, 그는 배를 타고 잉글랜드 리버풀로 가서, 시내의 성십자 가톨릭 교회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그곳에서 그는 교황청 경비 용역 업무를 마칠 때까지 유럽을 몰래 떠돌았다. 그의 학창 시절 친구 중 한명인 헨리 쎄인트 마리가 1866년 봄 교황청 경비를 서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서는 미국 정부에 신고를 했다. 수랏은 교황청 기관에 체포되었지만, 의심스런 상황이라 생각하고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침내 1866년 11월 이집트에서 미국 정부 요원에게 체포되었다. 수랏은 1876년 여름 워싱턴에서 링컨 살해범으로 법정에 섰다. 변호인 측은 존 수랏을 모르지만 4월 13일과 15일 사이에 현장에서 그를 목격했다고 말했던, 뉴욕 엘미라에 사는 4명의 주민을 증인으로 요청했다.[76] 15명의 검찰측 증인들(일부는 그를 아는)은 워싱턴에서 피고인을 암살 당일 또는 여행지에서 또는 당시 수도에서 그들이 알아볼 수 있었던 한 남자를 목격했다고 말하거나, 닮았다고 말을 했다. 결국 배심원들은 평결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수랏은 석방되어서 1916년까지 평생을 자유인으로 살게 된다.[77]
공모자들의 재판 [ 편집 ]
암살 이후, 수십 명의 암살 용의자들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암살과 약간의 관련이 있다고 밝혀진 모든 사람 또는 도주 중 부스나 헤럴드와 사소한 접촉이라도 한 사람들은 모두 투옥되었다. 이렇게 투옥된 사람들 중에는 수랏 부인의 집에 하숙하던 루이스 J. 바이히만과 부스의 형제인 주니어스 브루터스 부스 (암살 당시 신시내티에서 연극을 하던); 40일동안 투옥된 극장주 존 T. 포드, 부스가 말을 빌린 워싱턴의 마방 주인 제임스 펌프리, 수랏 부인의 메릴랜드 술집에 세를 주고, 부스와 헤럴드에게 4월 14일 당일 날 카빈, 로프, 위스키를 제공한 존 M. 로이드, 그리고 포토맥 강을 건너 부스와 헤럴드가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 새뮤얼 콕스와 토머스 A. 존스 등이 있다.[78]
위에서 언급된 모든 사람들이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석방되었으며, 최종적으로 8명(남자 7명에, 여자 1명)[79]으로 좁혀졌다. 새뮤얼 아놀드, 조지 애체롯, 데이빗 헤럴드, 새뮤얼 머드, 마이클 오래플린, 루이스 파월, 에드먼드 스팽글러 (포드 극장의 무대담당자로 부스에게 말을 주어 피너츠 버로우에게 잡고 있으라고 했던), 그리고 매리 수랏이었다.
8명의 용의자는 1865년 5월 1일 당시 앤드류 존슨 대통령의 명령으로 군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9인 위원회는 데이빗 헌터 중령이 이끌고 있었다. 나머지 여덟 명의 결정권자들은 루 월리스 소장, 로버트 샌포드 포스터, 토머스 맬리 해리스, 앨비언 P. 하우와 오거스트 카우츠 준장과 제임스 A. 에킨과 찰스 H. 톰킨스 대령, 그리고 데이빗 램지 클렌드닌 중령이었다. 검찰 쪽은 군 법무감 조제프 홀트가 이끌고 있었으며, 법무관보로는 미국 의회 존 A. 빙엄과 헨리 로렌스 버넷 소령이 맡았다. 재판은 벤 피트먼과 여러 조수들이 속기록을 담당하였고, 1865년 출판되었다. 군사법재판소에 그들이 재판을 받는다는 사실은 에드워드 베이츠와 기드온 웰즈 두 사람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민사 법원이 재판을 담당했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법무부 장관 제임스 스피드는 군사적 모의가 포함되었으며, 피고가 적군처럼 행위를 했고, 콜럼비아 특별구에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군사법재판소의 이용을 정당화시켰다. (1866년, 밀리간 사건(Ex parte Milligan) 판결에서 미합중국 연방 대법원은 민사 법원이 관할하는 지역에서 군사법재판소의 이용을 금지했다.)[80] 이러한 의견 불일치는 유죄 평결과 2/3의 사형을 결정하는 배심원에 대해 최소한의 군인을 요하도록 법으로 규정한 피고에 대해서도 제기되었다. 또한 피고는 존슨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항소할 수가 없었다.[81]
이 재판은 266명의 증인이 소환되면서 약 7주간 진행되었다. 구류에서 석방된 루이스 바이히만이 핵심 증인이었다. 피고 모두는 6월 30일 유죄 판결을 받았다. 매리 수랏, 루이스 파월, 데이빗 헤럴드, 그리고 조지 애체롯은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 새뮤얼 머드 박사와 새뮤얼 아놀드, 마이클 오래플린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머드는 군사법재판소에 5-4 한 표 차이로 교수형 당하는 것을 모면했다. 에드먼드 스팽글러는 6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상하게도, 매리 수랏이 교수형 선고를 받은 이후, 배심원 중 5명이 선처를 호소하는 편지에 서명했다. 그러나 존슨은 처형을 중단하지 않았다. (존슨은 이후 그 편지를 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82])
1865년 7월 7일, 수랏, 파월, 헤럴드, 그리고 애체롯은 레슬리 J. 맥네어 요새에서 교수형을 당했다.[83] 북군 윈필드 스콧 핸콕 장군이 처형을 참관하였다. 매리 수랏은 미합중국 정부에 의해 처형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84] 오래플린은 1867년 황열로 옥사하였다. 머드, 아놀드, 그리고 스팽글러는 1869년 앤드류 존슨 대통령에 의해 사면을 받았다.[85] 1875년에 사망한 스팽글러는 남은 평생동안 부스로부터 말을 잡고 있으라는 요청만 받았지 그 음모와 전혀 연루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머드의 과실 [ 편집 ]
머드의 과실 정도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논란으로 남아있다. 머드의 손자인 리처드 머드와 같은 어떤 이들은 머드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게다가 다리 골절상을 입어 밤늦게 자신의 집에 찾아온 사람을 단순히 치료했다고 투옥되었다면서 무죄라고 주장했다. 암살 후 1세기에 걸쳐, 리처드 머드에게 편지를 쓴 지미 카터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모두 그의 조부가 무죄라는 사실에 동의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에드워드 스티어스 주니어와 제임스 스완슨과 같은 다른 이들은 새뮤얼 머드가 납치 시도가 실패한 그 달 이전에 부스를 세 번이나 방문을 했다고 주장을 했다. 최초의 방문은 1864년 11월에 암살 음모를 도와줄 동료를 찾던 부스가 남군 비밀 조직의 요원에 의해 머드에게 안내되었다. 12월에 부스는 머드를 다시 만나서 그의 농장에서 밤을 세웠다. 12월 말, 머드는 워싱턴으로 가서, 부스를 그가 알고 있는 남군 요원 존 수랏에게 소개를 했다. 게다가, 조지 애체롯은 부스가 머드의 납치 계획을 대비하여 집에 물품을 보냈다고 증언했다. 머드는 암살 사건 이후 집으로 찾아온 관계자들에게 치료가 필요해 나타났던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거짓말을 했고, 부스와 헤럴드가 어디로 갔는 지에 대해 거짓 정보를 주었다.[86][87] 그는 또한 부스의 상처난 다리에서 잘라낸 모노그램이 있는 신발을 다락방 판자 뒤에 숨겼지만, 머드의 집에 대한 철저한 조사로 이 추가 증거가 드러났다. 하나의 가정은 다음과 같다. 머드 박사가 납치 계획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동참했다는 것이다. 링컨이 부상을 입은 경우 치료를 위해 들를 것이고, 부스는 그리하여 의사를 떠올려 4월 15일 이른 시간에 도움을 받으러 그의 집에 간 것이다.[88][89]
영향 [ 편집 ]
링컨은 암살당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의 암살 사건은 오랜 기간 미국에 영향을 주었으며, 남북 모두에서 애도를 표하고 있다. 여러 도시에서 부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던 사람들을 습격한 여러 건의 사건이 있었다.[90] 링컨이 죽은 후 부활절 미사를 통해, 전국의 성직자들이 링컨을 찬송했다.[91] 수백 만명의 사람들이 1865년 4월 19일 워싱턴 D.C.에서 있은 장례 행렬에 찾아으며[92], 그의 유해는 뉴욕에서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묘지까지 1,700 마일 (2,700 km)를 지나왔다. 그의 유해와 장례 열차는 그 길을 따라 수백 만명의 사람들이 지켜보게 되었다.[93]
링컨의 장례 운구 열차
링컨의 사후, 율리시즈 S. 그랜트는 그를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라고 말했다.[94] 남부 태생의 엘리자베스 블레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부 태생의 동정론자들은 이제 알고 있다. 그들이 다시 찾기를 원해온 적극적이고, 더 강력한 보호자 그리고 봉사자를 잃어버렸음을”[95]
앤드류 존슨은 링컨의 사후 바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존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없는 대통령이 되었다.[96] 그는 1868년 하원에 의해 탄핵을 당지만, 상원에서 한 표 차이로 탄핵을 모면했다.[97]
윌리엄 수어드 장관은 암살 사건 2년 이후 부상에서 회복되어, 앤드류 존슨 대통령이 임기를 마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일을 했다. 이후 그는 당시에는 ‘수어드의 뻘짓’(Seward’s Folly)이라고 알려졌던 ‘알래스카 매입’ 협상을 했으며, 그 협상을 통해 미합중국은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사들일 수 있었다.[98]
헨리 래스본과 클라라 해리스는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2년 뒤에 결혼을 하고, 독일 하노버에서 미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래스본은 이후 정신적인 문제가 생겼고, 1883년에 아내 클라라를 쏘고, 찔러 죽였다. 그는 여생을 금치산자로서 독일에 망명을 하면서 보낸다.[99]
존 포드는 살인 사건 2개월 후에 극장을 재개장 하려고 했지만, 대중들의 분노로 인해 접어야 했다. 1866년 연방 정부가 그 건물을 포드로부터 매입을 하여, 내부를 드러내고, 사무실 빌딩으로 개조하였다. 1893년, 내부가 붕괴되어 22명의 서기관이 사망을 했다. 이후에는 창고로 사용되다가, 1865년 외형으로 복원될 때까지 비워두었다. 포드 극장은 1968년 암살 박물관과 연극공연장으로 재개장하였다. 대통령석은 항상 비워져 있다.[100] 피터슨 하우스는 1898년에 링컨 대통령 사망 가옥으로 구매되었으며, 이것은 기념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연방 정부가 구매한 최초의 부동산이었다. 오늘 날, 포드 극장과 피터슨 하우스는 포드 극장 국립 사적지로 운영되고 있다.
링컨이 암살된 밤에 썼던 탑햇
링컨이 부상당해 누워있던 침대와 침대에서 사용된 다른 물건들은 시카고 수집가 찰스 F. 컨터가 구매하여 현재 소유하고 있으며, 시카고 역사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101][102] 현재의 국립 보건 박물관인 군 의료 박물관(National Museum of Health and Medicine)은 당시 암살과 관련된 여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 전시되어 있는 것은 링컨을 저격한 총탄과 반이 사용했던 조사 장비, 링컨의 두개골 파편과 모발, 그리고 링컨의 피가 묻은 혈압계가 있다. 링컨이 앉아 있다가 저격을 당한 의자는 미시간주 디어본에 있는 헨리 포드 박물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103]
1956년 2월 9일, 95세의 새뮤얼 J. 세이모어는 《나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I’ve Got a Secret)라는 TV 게임쇼에 출연하였다. 유명 인사 패널들이 결국 세이모어의 비밀을 맞추었다. 그는 링컨이 암살되던 그 밤에 포드 극장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1865년 당시 다섯 살이던 세이모어는 그 사건을 목격한 마지막 생존자였다. TV에 방연된 지 두 달 후 세이모어도 세상을 떠났다.
1909년 링컨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 그의 초상화가 1달러 지폐에 실림으로써 링컨을 기념하게 된다.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 기념관은 1922년에 개장하였다.
암살 전날, 링컨은 $800 달러짜리 가계 수표를 사용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매리 토드 링컨이 쓴 빚을 탕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012년 헌팅턴 은행 클리블랜드 지점에 그 수표와 다른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는 수표가 전시되어 있었다. 헌팅턴 은행의 직원이 2011년 그 수표를 1983년 획득한 헌팅턴 은행에서 온 낡은 서류를 조사하다가 발견을 했다. 비록 다른 여러 역사적 인물들이 쓴 수표도 전시가 되었지만, 링컨 사망 이틀 전에 사용했던 수표는 단연 최고의 주목을 받았다.[104]
링컨의 사후 주머니에서 발견된 것은 대통령 재선을 위한 잉글랜드 의회 의원 존 브라이트의 감사장이었다.[105]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애와 업적
개요
링컨은 노예제도의 확장에 대해서 공개적인 반대자였으며, 선거 기간 중 토론과 연설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 결과 그는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확보하였다. 대통령이 된 후에 그는 임기 중 일어났던 남북 전쟁에서 북부 주를 이끌며 연방에서 분리하려 노력했던 남부 연방에 승리를 거뒀다. 1863년에는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고, 미국 헌법 수정 제13조의 통과를 주장하며 노예제의 폐지를 이끌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군사적, 정치적 양면으로 내전 승리에 집중했으며, 미국 남부 11개의 주의 분리 독립 선언 이후, 그 주들과 통합할 방법을 계속 모색했다.
그는 전례 없는 군사 조치를 취했으며, 분리 독립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재판 없이 수감하거나 구금 조치를 취했다. 링컨은 남북전쟁에서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과 같은 최고 지휘관의 선발에 깊이 관여하며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역사가들은 그가 공화당 내 여러 분파의 지도자를 내각에 참여시킴으로써 당의 분파가 협력하도록 잘 조정했다고 말한다. 링컨은 1861년 말 트렌트호 사건에서 영국과 전쟁 위기까지 몰렸던 위기를 잘 해결했다. 링컨의 리더십 아래, 북군은 남북의 경계가 되던 주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 또 링컨은 186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다시 승리했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과 공화당 급진파 연방의원과의 갈등: 미국 남북전쟁 시기를 중심으로
이 논문은 남북전쟁 시기의 미국 대통령과 연방의회 의원 간의 갈등을 여러 가지 쟁점을 통해 알아보았다. 특히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전시의 특권과 권한강화와 이에 대한 의원들의 저항을 알아보았다. 링컨 대통령은 전시와 같은 특별한 경우에 독단적인 헌법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헌법 해석은 이전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과 제임스 포크(James K. Polk) 대통령에서 나타난 적이 있었고, 그것을 링컨은 더욱 과감하게 확대하였던 것이다. 남북전쟁 시기에 링컨 대통령과 연방의회 의원들 간에는 여러 쟁점을 두고 갈등과 합의를 하였다. 대통령은 필요하다면 경제적인 이익이나 기업 보조금 그리고 갖가지 직책과 관직, 장교 보직으로 많은 의원들을 회유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필요한 것이 분명하다면 과감한 정책으로 행정부 특히 대통령의 지위를 강화했다. 의회에 주어진 헌법상의 권력도 무시하고 대통령의 독단으로 행한 일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전시가 아니라면 탄핵을 당했겠지만 의원들도 반대와 조정을 통해 해결해 나갔다. 공화당 안에서도 온건파는 주로 링컨을 지지했고, 급진파는 반대했지만 그 반대도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불과한 것이 많았다. 그것은 지역구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선거를 위한 이합집산, 관직을 위한 싸움, 정계 거물이 되기 위한 노력 등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주로 인신보호령과 노예해방령 그리고 ‘10퍼센트안’과 ‘웨이드-데이비스법안’을 다루었다. 앞의 3개는 대통령 포고문이고 마지막 것은 법안이었다. 따라서 웨이드-데이비스 법안만 의회에서 투표로 가결하였고, 대통령은 즉각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인신보호령에 대한 문제는 의회와 대통령의 헌법을 둘러싼 권력 문제였지만, 주지하다시피 노예문제는 보다 크고 당면한 문제였다. 재건안에 대해서도 대통령의 사고와 의원들의 생각이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링컨과 의원들 모두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얽혀 있고, 링컨 대통령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했던 것이다. 결국 링컨 대통령은 도덕성이나 리더십도 탁월했지만 의원들에 대한 조정 능력과 수완이 월등했다. 그리고 링컨도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정치가였다. 그가 바라는 것은 미국이 재통일되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야만 했다. 결국 미국 대통령과 연방의회의 관계는 19세기 초․중반에는 연방의회의 권한이 더 셌지만 남북전쟁 시기가 되면 대통령의 권력이 강화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사에서 19세기 초반에는 엘리트와 연방의회의 시대였지만,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0년대에는 에이브래험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는 것이다.
This Theses aim to understand the conflicts of U.S. President with U.S, Congress. To understand these conflicts We must think about the presidential powers. Especially President Abraham Lincoln claim to presidential Powers overwhelmed to congress in War time government. In the Civil War, President Lincoln try to persuade the Congressman or Senate to participate the government offices. But If it necessary, Presidential Powers enforced in a majority time on american Political History. In Republican party, majority congressmen supported to president Lincoln, the Radicals did not supported president. The typical Radicals like Charles Sumner, Thaddeus Stevens, Benjamin Wade was not a normal political men. the Radicals were men of principle who, on the issue of slavery, would not compromise. they were men of morality who advocated an absolute solution. In the Civil War, the Radicals reacted like true pragmatists. They could through their program like Slave or economic game. The great obstacle was President Lincoln. Lincoln was as antislavery any Radical, but he would approach the problem in a different way, with cautious empiricism of the politician rather than theorist. The concept of the conflict between Lincoln and the Radicals has validity, is of value in helping us to understand the Civil War. President Lincoln was excellent of leadership, control power was far more, most affluent politician. President Lincoln was most active and practical man. His hope was Reunited America and must did anything. Consequently, American Political arena, congressional power was more active than presidential power but mid 19th century, Presidential power was more strong than ever. In American History, early 19th century was elite and deferential societies but 1860’s -in the Civil War- by President Lincoln “the Age of President” were accomplished.
스프링필드: 에이브러햄 링컨의 유산과 66번 국도의 향수
스프링필드의 66번 국도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은 코지 도그 드라이브인(Cozy Dog Drive-In)과 칠리 팔러(Chili Parlor)입니다. 코지 도그 드라이브인에는 콘도그를 처음 만들었음을 나타내는 “FOOD” 간판이 있어 찾기도 쉽습니다. 1940년대에 문을 연 이곳은 식사와 기념품, 미니 박물관을 겸하고 있습니다. 66번 국도의 수많은 기념품 컬렉션을 살펴보며 클래식한 “막대기 핫도그”를 맛보고 옛날식 주유 펌프 앞에서 포즈를 취해 보세요. 다음에는 칠리 팔러를 방문할 차례입니다. 쾌활한 성격의 로즈가 주인인 이곳에서는 마일드, 미디엄, 슈퍼핫, 고기 첨가 또는 무첨가 등 원하는 방식으로 유명한 칠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저자 : 에이브러햄 링컨
틀:대통령 정보 틀:에이브러햄 링컨 에이브러햄 링컨(영어: 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 ~ 1863년 4월 15일)은 1861년 3월부터 암살된 1865년 4월까지 미국의 16번째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그는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내부적 위기로부터 나라를 이끌어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연방을 보존하였고, 노예제를 끝냈다. 그는 당시 미 북서부 변방 개척지에 사는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공부를 학교에서 배우기 보다는 혼자서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어 혼자 공부를했다. 이후 그는 변호사가 되었으며, 일리노이주 의원이 되었고, 미국 하원의원을 한 번 했지만, 상원 의원 선거에서는 두 번 실패하였다. 그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는 못했지만, 자상한 남편이었고 네 아이의 아버지였다.
개요 [ 편집 ]
링컨은 노예제도의 확장에 대해서 공개적인 반대자였으며, 선거 기간 중 토론과 연설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냈다.[1] 그 결과 그는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확보하였다. 대통령이 된 후에 그는 임기 중 일어났던 남북 전쟁에서 북부주를 이끌며 연방에서 분리하려 노력했던 남부 연방에 승리를 거뒀다. 1863년에는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고, 미국 헌법 수정 제13조의 통과를 주장하며 노예제의 폐지를 이끌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군사적, 정치적 양면으로 내전 승리에 집중했으며, 미국 남부 11개의 주[2] 의 분리 독립 선언 이후, 그 주들과 통합할 방법을 계속 모색했다. 그는 전례없는 군사 조치를 취했으며, 분리 독립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재판 없이 수감하거나 구금 조치를 취했다. 링컨은 남북전쟁에서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과 같은 최고 지휘관의 선발에 깊이 관여하며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역사가들은 그가 공화당 내 여러 분파의 지도자를 내각에 참여시킴으로써 당의 분파가 협력하도록 잘 조정했다고 말한다. 링컨은 1861년 말 트랜트호 사건에서 영국과 전쟁 위기까지 몰렸던 위기를 잘 해결했다. 링컨의 리더십 아래, 북군은 남북의 경계가 되던 주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 또 링컨은 186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다시 승리했다. 공화당의 중도파 수장으로서, 링컨은 모든 방향에서 비판을 받았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던 공화당 급진파에서는 남부에 대해 더욱 강한 조치를 촉구했으며, 전쟁에 반대하던 민주당에서는 평화와 협상을 촉구했다. 분리독립주의자들은 링컨을 적으로 보았다.[3] 링컨은 반대파에 지원책을 폄으로서 지지를 끌어내고자 했으며, 뛰어난 수사학 이용과 연설을 통해 대중의 의견을 이끌었다.[4][5] 예를 들어 게티스버그 연설은 미국의 전통인 자유주의 곧 자유, 평등, 민주주의에 대한 상징이 되었으며,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설로 손꼽힌다. 전쟁이 종료돼 가면서 링컨은 전후 재건에 대해 신중한 시각을 보이며 관대한 화해를 통해 국가를 통합하는 정책을 주장했다. 남부연합을 이끌던 로버트 리 장군의 큰 패배가 있은지 6일 후에 링컨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임기 중에 암살되었다. 링컨은 지속적으로 전문가들에게서 모든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으며 영웅, 성자, 순교자가 된 실제 키(193 cm)만큼 역사의 거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성립 당시의 13주 이외의 지역[6] 에서 태어난 대통령이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국의 5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초기 생애 [ 편집 ]
개척자 [ 편집 ]
에이브러햄 링컨은 1809년 2월 12일에 토머스 링컨과 낸시 링컨의 둘째 자녀로 태어났으며, 그의 생가는 통나무집이었다.[7] 링컨의 조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역사가들은 그의 조상을 추적하였고 새뮤얼 링컨을 발견했다. 새뮤얼은 1637년에 영국 노어포우크로부터 출발하여 미국 매사추세츠주 베이 컬러니에 도착한 수습 직조공 곧 섬유노동자였다.[8][9] 그러나 링컨은 조상에 대해서 자신의 조부 에이브러햄을 알았을 뿐이었고, 손자와 이름이 같았던 조부는 지역 민병대장이었으며, 버지니아 로킹햄 지역의 81만 평방미터(200 acre) 정도의 땅을 상속 받은 건장한 지주였다.[8] 나중에 조부는 가족을 이끌고 로킹햄으로부터 켄터키주의 제퍼슨 마을로 이주했다.[8][10] 켄터키로 옮겨온 후 조부는 매복해 있던 미국 원주민에게 습격 받았고, 1786년에 자신의 아이들인 머디카이, 조시아, 토머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10] 머디카이는 총을 쏴서 토머스를 미국 원주민으로부터 구해낸 적이 있었다. 법에 의해서 장남인 머디카이는 유산인 토지 전부를 상속받았다.[11]
아버지 토머스 [ 편집 ]
토머스는 시골 켄터키에서 높이 평가 받는 시민이 되었다. 그는 여러 농장들을 팔고 샀으며, 그 농장 중에는 “싱킹 스프링 팜”(Sinking Spring Farm)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가족은 분리 침례교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그 종파는 높은 도덕적 기준들을 가지고 있어서 술을 마시지 않고, 춤추지 않으며, 노예제도를 반대하였다.[12] 토머스는 켄터키에서 “상당히 즐길만한 위치”에 있었으며, 그 곳에서 배심원 역할을 맡았고 토지의 가격을 측정하고 지역을 순찰하고 죄수들을 지켰다. 그의 아들인 에이브러햄이 태어났을 때, 토마스는 242만 m²(600 acre)의 농장들과 여러 부동산과 가축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그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에 속했다.[8][13] 하지만 1816년에 링컨 가족은 잘못된 토지재산 소유권으로 인해 그들의 땅을 잃었고, 인디애나주 페리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나중에 링컨은 이 이주를 두고 “부분적으로는 노예제도 때문”이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 가장 주된 이유는 토지 등기의 어려움 때문이었다.[14]
어머니의 죽음 [ 편집 ]
에이브러햄 링컨 출생지 국립 공원에 있는 상징적인 통나무 오두막집
1818년 10월 5일에 링컨의 어머니는 독초를 먹은 소에서 짠 우유가 매개체인 우유병 혹은 우유중독으로 34세로 삶을 마감했다.[15] 아내의 죽음으로 집안을 돌볼 사람이 없게 되자, 토머스는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며 링컨이 “엄마”라고 불렀던 친구 사라 존스턴과 1819년 12월 2일에 재혼하였다.[16] 사라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받아다가 씻길 만큼 아이들을 따뜻하게 돌보았고, 책을 좋아하는 링컨의 편을 들어준 덕분에 링컨은 풍부한 학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부친 토머스는 배움은 없었지만 말을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는 훌륭한 이야기꾼이었으므로,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링컨은 연설을 배웠다.[17] 그러나 그 후 링컨은 아버지와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된다. 링컨은 자신의 아버지가 배움이 없는 것이 유감스러웠고, 개척지에서 살면서 해야하는 힘든 노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집안에 있는 남성으로서 해야 하는 잡일들을 감당하였고, 그 결과 가로장 울타리를 짓는데 능숙한 나무꾼이 되었다. 또한 링컨은 21세가 될 때까지 자신이 바깥에 나가 일해서 번 돈을 아버지에게 모두 드리는 당시의 관습에 동의하였다.[15] 이후에 그는 때때로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돈을 빌렸다.[18]
독립하다 [ 편집 ]
1828년 1월 20일에 링컨의 누나인 사라가 아론 그릭스비와 결혼한지 17개월만에 아이를 낳다가 21세의 나이에 산욕으로 사망했다.[9] 1830년에 공포스런 우유병이 확산되자 링컨 가족은 일리노이 주에 있는 메이콘의 국유지로 이주하였다.[19] 1831년에 그의 아버지는 일리노이주 콜스로 이사를 했고, 당시 22세가 되었던 링컨은 자신의 길을 개척하여 카누를 타고 상가몬 강을 내려가 일리노이 주의 뉴 살렘 마을에 도달하였다.[20] 1831년 봄에 링컨은 뉴 살렘의 사업가 덴톤 오푸트에게 고용되었고, 친구들과 함께 링컨은 뉴살렘으로부터 상가몬 강과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보트로 물건을 실어날랐다. 노예가 직접 목격한 바에 따르면,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링컨은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21] 이처럼 청년 시기에 링컨은 우체국장, 변호사, 뱃사공, 가게점원, 토지측량 등 다양한 일에 종사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오하이오 주 국회의원으로 링컨을 경멸했던 제임스 가필드는 링컨 대통령을 가리켜 “일리노이의 이류 변호사가 미래의 모든 세대가 기억할 만한 말을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다니,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뜻밖의 사건이네.”라고 비아냥거렸다.[22] 가필드의 비아냥거림처럼 링컨의 정식 교육은 약 18개월 동안 여러 명의 순회 교사[23] 로부터 수업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는 대부분 스스로 공부했으며, 열심히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24] 그는 매우 치열한 레슬링 시합을 치르면서 팔 힘이 세고 대담한 사람으로 알려졌다.[25] 다만 그의 가족과 이웃들은 그를 게으르다고 생각했다.[26][27] 링컨은 동물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아서 사냥이나 낚시를 하지 않았다.[28]
결혼과 가족 [ 편집 ]
링컨이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여성은 그가 1835년에 뉴 살렘에서 만난 앤 루트리지이었다. 두 사람은 사귀었으나 정식으로 약혼하지는 않았다. 앤은 L씨와의 결혼을 앞두고 이 사실을 링컨에게 알리고 싶어했지만, 8월 25일에 그녀는 장티푸스로 인해 사망하였다.[29] 1830년대 초반에 그는 여자 형제를 만나기 위해서 켄터키로부터 온 메리 오웬스를 만났다. 1836년 하반기에 링컨은 만약에 메리가 뉴 살렘으로 돌아온다면 그녀와 사귀려고 했다. 메리는 1836년 11월에 살렘으로 돌아왔고, 링컨은 한 동안 그녀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1837년 8월 16일에 링컨은 메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메리가 자신과의 관계를 끊는다고 하더라도 비난하지 않겠다고 썼다. 그녀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다.[30] 1840년에 링컨은 메리 토드와 약혼했는데, 그녀의 집안은 켄터키 주 렉싱턴에서 노예를 소유한 부잣집이었다.[31] 그들은 1839년 12월에 스프링필드에서 만났고,[32] 12월 말 쯤에 약혼하였다.[33] 1841년 1월 1일에 결혼하려 했지만 그 때 두 사람은 결혼을 취소하였다.[32] 나중에 그들은 파티에서 만났고, 결국 두 사람은 1842년 11월 4일에 메리의 시집간 언니가 사는 스프링필드 저택에서 결혼하였다.[34]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링컨은 또다시 메리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였고, 그가 어디로 가려고 했었는지 물었을 때, “지옥이겠죠” 라고 대답하였다.[35]
1864년 매튜 브레디의 사진, 링컨 대통령이 어린 아들인 테드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1844년에 링컨 부부는 링컨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가까운 스프링필드에 집을 한 채 샀다.[36] 메리 토드 링컨은 집에서 부지런히 일했고, 남편이 변호사 일을 해서 벌어오는 한정된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했다.[37] 어느 날 저녁에 메리가 불을 다시 지펴야 하느냐가 네 번이나 물어 보았음에도 링컨이 책읽기에 몰두하여 대답이 없자, 그녀는 장작 조각으로 링컨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38] 로버트 토드 링컨이 1843년에 태어났고 에드워드 베이커 링컨이 1846년에 태어나면서, 링컨은 점점 수가 늘어나는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가정부에 따르면 링컨은 “특별하게 자녀들을 좋아했다고” 한다.[39] 로버트는 링컨의 자녀 중 유일하게 18살을 넘겼고, 에드워드는 아마도 폐결핵이었을 병에 걸려 1850년 2월 1일에 스프링필드에서 세상을 떠났다.[40] 자녀를 잃은 링컨의 슬픔은 윌리엄 월리스 링컨이 11개월 뒤인 이듬해 12월 21일에 태어나면서 그 정도가 완화되었지만, 윌리엄 역시 링컨이 첫 번째 대통령 임기를 수행하던 1862년 2월 20일에 11살의 나이로 워싱턴 D.C.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41] 링컨의 넷째 아들인 테드는 1853년 4월 4일에 태어났고, 대통령의 사후에도 살았지만 1871년 시카고에서 요절했다.[42] 이러한 자녀의 죽음은 링컨 부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말년에 메리는 남편과 아이들을 잃은 데서 오는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며, 로버트 링컨은 그녀를 1875년에 정신병원으로 보냈다.[43] 에이브러햄 링컨은 오늘날에는 임상 우울증이라고 불리는 우울한 상태로 인해 고통받았다.[44]
정치 생활 [ 편집 ]
1832년에 일리노이주 의회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여 첫 정치 경험을 하였다. 1833년에는 관심이 있던 법률을 혼자 공부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1834년 일리노이주 주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정치계에 입문, 1846년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858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노련한 정치가 더글러스 현역 상원의원과 경쟁을 벌인다. 이때 이들의 논쟁 주제는 노예제도였는데, 당시 링컨은 분열된 집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연설로 노예 제도로 대립하던 미국인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결과는 더글러스의 상원의원 재선이었지만, 더글러스와의 논쟁 때 노예제도를 “악의 제도”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노예제도 반대론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1860년 11월 6일,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남부에서는 ‘노예제 반대론자’가 대통령이 된 것에 대해 위기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냈고, 링컨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남북 전쟁이 일어난다. 아직 전쟁 중이던 1862년 2월 22일을 기하여 조지 워싱턴 초대 미국 대통령에게 명예역 미국 육군 대장 계급 추서를 한 그는 1864년 선거에서 민주당 전쟁 지지세력과 힘을 모아 국민연합당을 창당하여 대선에서 승리하였다. 부통령으로는 민주당 출신의 앤드루 존슨을 내세웠다.
암살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링컨 암살 사건 입니다.
`1864년 유명 배우이자 남부 지지자였던 존 윌크스 부스는 링컨을 인질로 잡아 남부 포로를 석방하기 위한 계획을 짰다. 그러나 4월 11일 링컨의 흑인 투표권을 위한 연설 듣고서 몹시 화난 부스는 링컨을 암살하기로 계획을 수정한다.[45] 대통령 부부가 포드 극장에 간다는 사실을 안 부스는 공범자들과 함께 부통령 앤드루 존슨과 서기 윌리엄 H. 세이워드를 암살하기로 한다. 링컨은 경호원 워드 힐 라몬(Ward Hill Lamon) 없이 연극 《우리 미국인 사촌》(Our American Cousin)을 1863년 4월 14일 관람한다.[46]
미국 우체국 1866년 발행, 링컨 암살 1주기에, 미국 우체국은 사망한 대통령을 기리며 대통령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47] 링컨이 등장한 첫 우표.미국 우체국 1866년 발행, 링컨 암살 1주기에, 미국 우체국은 사망한 대통령을 기리며 대통령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링컨 경호원이었던 존 파커는 잠시 링컨의 마부들과 한잔 하려고 극장 옆 ‘스타 살롱’(Star Saloon)으로 나갔다. 이 때문에 대통령은 발코니 관람석에서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었다. 기회를 노리던 부스는 10시 13분에 링컨 바로 뒤에서 머리를 겨눠 치명상을 입혔다. 헨리 래스본 소령이 부스를 잠시 붙잡았지만, 부스는 그를 찌르고 탈출했다.[48][49] 10일 간 추격 끝에 부스는 워싱턴 D.C. 30마일 남쪽에 있는 버지니아의 개럿 농장(Garrett’s farm)에서 발견되었다. 오랜 싸움 끝에 부스는 4월 26일 사살당한다.[50] 군의관 찰스 리얼(Charles Leale)은 링컨의 부상을 치명상으로 진단했으며, 길 건너 양복점인 피터슨 하우스(Petersen House)로 링컨을 옮겼다. 9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링컨은 4월 15일 오전 7시 22분에 사망한다. 전쟁 서기관 스탠튼(Stanton)이 경례를 하고 “이분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근처 있던 장로교 성직자 피니어스 덴스모어 걸리(Phineas Densmore Gurley)목사가 임종 기도를 올렸다.[51] 비 내리는 동안 성조기에 싸인 링컨의 시신은 장교들이 예를 갖추어 백악관으로 옮겼으며, 도시 교회에서 조종을 울렸다. 암살 이후 부통령 앤드루 존슨이 제20대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며, 다음날 오전 10시에 대통령 선서를 했다. 링컨의 시신은 기차로 워싱턴에서 고향인 켄터키 스프링필드로 옮겨진 후에 오크리지 묘지에 안장되었다.[52] 뜻밖에도 링컨이 암살된 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성 금요일이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링컨에게서 워싱턴과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느낀다고 말한다.
노예 제도에 대한 견해 [ 편집 ]
일부 기독교인은 링컨이 노예 제도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보아 반대했다고 인식하고 있으나, 링컨의 주된 관심사는 노예 제도 자체나 노예제의 폐지가 아니라 노예제의 존폐 문제를 두고 서로 대립하던 미국 북부와 남부의 분리를 막아 미 연방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53] 링컨이 대통령이 된 후에 미국 정부는 노예 출신 흑인들에게 자유를 주었으나 생계 문제는 고스란히 남았기 때문에 자유인이 된 흑인들은 옛 상전 밑에서 농장 노동자로 다시 종속되었다. 노예 제도의 폐지 후에도 흑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차별은 계속되었고, 백인우월주의를 주장하는 KKK 등 테러 단체까지 등장하였다. 링컨은 노예제의 비인도성에 대해 “악의 제도”라고 말할 정도로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으나, 노예 제도와 흑인 문제 전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의 노예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는 당대 미국 북부 지식인들의 교양과 상식을 대변한 것으로, 이는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노예보다는 저임금 노동자가 필요했던 미국 북부 자본가들의 경제적 이익에도 부합하였다. 경제학자 토머스 딜로렌조는 저서 《링컨의 진실 – 패권주의, 위대한 해방자의 정치적 초상》에서 링컨의 연설문, 군 지휘관들에게 보내는 서한 등 1차 문헌을 참고자료로 인용하여, 링컨은 단 한 번도 흑인 노예를 변호한 적이 없고, 노예 해방 선언은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도구이며, 남북전쟁 당시 조직적 파괴, 자신을 비판한 언론 탄압, 인신 보호 영장 정지 등으로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한 점을 들어 링컨을 “정략적 독재자”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미국 중앙정부의 비대화, 로비의 횡행, 정경유착형 엽관제를 불러왔다고도 비판했다.
사생활 [ 편집 ]
링컨은 농담을 잘하는 쾌활한 성격이었지만 모친과 누나의 요절, 우체국장 시절 사귀던 애인을 잃은 기억 때문에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재임 중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구나 링컨은 메리 토드와 연애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문화 갈등(=컬처 쇼크)을 겪었다. 물론 링컨은 친절한 남편이자 네 아이의 아버지였다고 전해지지만, 메리와의 성장 환경 차이는 극복하기 힘들었다. 메리는 명문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예의범절이 몸에 배었고, 소작인의 아들인 링컨은 자유분방하게 자랐기 때문에 벽에 발을 올려놓고 책을 읽는 등 제멋대로 행동했다. 이러한 차이는 이들 부부가 갈등을 겪게 했다. 어떤 사람은 토드가 악처였다고도 얘기했지만, 넓은 의미에서 그의 결혼 생활은 그럭저럭 행복했다고 전해진다. 뉴스위크 한국어판 보도에 따르면 1960년대에 한 내과 의사는 그가 마르팡 증후군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냈다. 링컨은 키가 매우 크고 사지가 길었는데 이는 마르팡 증후군의 특징이며, 이 증후군을 가진 소년이 링컨의 먼 친척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링컨의 DNA는 현재 남아 있지만, 그가 이 유전질환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링컨의 일생에 대한 사료(史料)로는 어머니 낸시의 사촌인 드니스 행크스의 증언[54] 과 변호사 시절 같이 활동한 윌리엄 헌돈 변호사의 전기가 있다. 링컨의 친구이자 법적인 동료였던 헌돈은 링컨이 1835년과 1836년간에 매독에 걸렸다는 말을 자신에게 했다고 주장했다. 헌돈은 링컨의 아내 역시 링컨에게서 매독이 옮았을 것으로 추측했고, 그의 세 자녀가 유아 사망에 희생된 이유도 매독과 관련있을 것으로 예상했다.[55]
노예해방선언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노예해방선언 입니다.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 초판을 내각들에게 발표하는 그림. Carpenter. 1864 년 그림.
링컨은 자신이 노예 제도를 없애기 위한 힘이 헌법에 의해 제한받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링컨은 새로운 미국 영토로 노예제 도입을 막는 것이 완벽한 노예제 폐지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또한, 각 주에 노예 소유주들에게 노예 해방에 대한 대가로 보상금을 지급하여 노예 제도를 축소할 경제적 유인책을 펴도록 설득했다. 링컨은 이 방식이 경제적으로도 노예제도를 없애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았으며, 이것이 미합중국 개국 정신에 부합한다고 보았다.[56] 하지만 1861년과 1862년의 노예 해방 시도는 반대했었는데, 이 선언으로 북부와 남부 경계 주의 반발을 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57] 1862년 7월, 의회에서 남북전쟁에 가담한 자들의 노예를 강제 해방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링컨은 의회 권력으로 이를 실현하는게 불가능하며, 전쟁 사령관 직권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보았지만, 이 법안을 승인했다. 그 달,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의 첫 판을 내각들에게 발표했다. 이 안에 그는 “정당하고, 필요한 군사 조치로서, 1863년 1월 이후부터, 남부에서 노예로 잡혀있는 모든 사람을 영구히 해방시킨다.”라고 적고 있다.[58] 1862년 9월 22일 발표되고, 1863년 1월 1일 발효된 〈노예 해방 선언〉은 북부의 통제 하에 들어있지 않은 영역의 모든 노예를 해방하도록 했다. 노예 제도 폐지가 군사적 목표로 설정되어, 북군이 남으로 진주하면서 해방된 노예가 3백만에 육박했다.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 선언하며 “나는 내 삶에서 내가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을, 내가 여기 서명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 느껴본 적이 없다” 고 첨언했다.[59] 노예 해방 선언이 발표된 후 13 명의 공화당 주지사가 전쟁 주지사 회의 에서 만나,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을 지지하되, 조지 B. 매클렐런 장군을 북군 사령관에 넣지 않도록 하는 것을 권고했다.[60] 노예 해방 선언 이후 해방된 노예를 소집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링컨은 이 정책을 처음에 완전히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을 표했지만, 1863년 봄, 그는 “대대적인 흑인 모병” 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다. 테네시주의 주지사 앤드류 존슨에게 쓴 흑인 군대 소집을 권하는 편지에서 링컨은 “5만 명에 달하는 무장하고, 훈련받은 흑인 병사들이 미시시피강변에서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반란은 끝날 것입니다” 고 쓰고 있다.[61] 1863년 말, 링컨의 지시에 따라 로렌조 토머스 장군은 20개 연대에 달하는 흑인들을 미시시피 강변에서 소집했다.[62]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링컨을 “처음으로 미국에서 내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려고 하지 않은 위대한 사람”으로 평했다.[63]
게티즈버그 연설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게티즈버그 연설 입니다.
틀:위키문헌 게티즈버그 연설은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난 후, 링컨이 전투 격전지에서 발표한 선언문으로, 짧은 문장 속에 민주주의의 이념을 잘 요약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연설의 가장 유명한 대목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은 사실 링컨이 먼저 한 말이 아니라 영국의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가 먼저 한 말을 링컨이 인용한 것이다. [64]
가족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주요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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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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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편집 ]
역대 선거 결과 [ 편집 ]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틀:위키공용 틀:위키인용집 틀:위키문헌
틀:미국의 대통령 틀:전임후임 틀:위대한 미국인 틀:위대한 미국인 명예의 전당 틀:보수주의 꼬리말
에이브러햄 링컨 : 제 1차 취임사 (1861)
제1차 취임사
1861년 3월 4일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당시 남북의 7개주는 이미 연방정부의 어떤 시도에도 반대할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링컨 대통령은 그의 제1차 취임연설에서, 연방은 주보다 오래되었으며, 연방 각 주간의 협약은 의무적이며, 취소할 수 없다는 헌법 원칙을 재천명했다.
…보편적 법칙과 헌법을 고찰한 주들이 모여 이루어진 이 연방은 영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국가의 기본법에는 영구성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규 정부로서 그 기본법 속에 자체의 종말에 관한 조항을 담은 예는 없었다고 단언해도 무방합니다. 우리 나라 헌법의 모든 명시적 조항을 계속 시행한다면 연방은 영원히 존속할 것입니다. 헌법 자체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어떤 행동에 의하지 않고는 연방을 붕괴시키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국이 정규 국가가 아니라 단지 계약과 같은 성격을 띤 주들의 연합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계약으로서의 연합이 계약을 맺은 당사자 전부가 아닌 일부에 의해 평온하게 해체될 수 있겠습니까? 계약의 어느 당사자가 그것을 어길 수도, 말하자면 파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약을 합법적으로 취소하는 데는 당사자 전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들 일반적 원칙들로부터 내려오면서, 법적으로 고찰해 보면 연방은 그 자체의 역사로부터 영원한 승인을 받는다는 명제에 도달합니다. 연방은 헌법보다도 훨씬 오래된 것입니다. 연방은 사실상 1774년의 동맹규약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연방은 1776년의 독립 선언으로 성숙해지고 지속되었습니다. 연방은 성숙을 거듭했고, 당시 13개 주 모두는 1778년의 연합규약으로써 연방이 무궁해야 함을 명시적으로 서약하고 보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787년에 헌법 제정의 목적으로 천명된 것 중의 하나가 “보다 완전한 연방을 형성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주들 가운데 단지 하나 또는 일부에 의해 연방의 붕괴가 합법적으로 가능하다면 연방은 영구성이라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를 상실할 것이기 때문에 헌법 제정 이전보다 불완전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런 견해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됩니다. 즉 어떤 주도 스스로의 단순한 발의로는 합법적으로 연방에서 빠져나갈 수 없고 그런 취지로의 결의와 포고는 법적으로 무효이며 그리고 어떤 주나 혹은 주들에서 미국의 권위를 거스르는 폭력 행위는 사정에 따라 반란 또는 혁명의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헌법과 법률에 비추어 연방은 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제 능력이 미치는 한 헌법 자체가 제게 명시적으로 명하는 대로 연방의 법률이 모든 주에서 충실히 시행되도록 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소박한 의무일 뿐이라고 여기며, 나의 당연한 주인인 미국 국민이 필요한 수단을 허락하지 않거나 어떤 권위 있는 방식으로 그것과 반대되는 일을 지시하지 않는 한 실행 가능한 데까지 그 일을 수행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하나의 협박이 아니라 단지 헌법에 정해진 바에 따라 스스로를 방어하고 유지하겠다는 연방의 결의 천명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이탈의 중심 개념이 곧 무정부 상태의 본질임은 명백합니다. 헌법상의 억제와 제약에 의해 행동이 한정되고 여론과 국민 감정의 신중한 변화에 따라 언제나 민감하게 움직이는 다수야말로 자유 국민의 유일한 참된 주권자 입니다. 그런 다수를 배척하는 자는 누구든 필연적으로 무정부 상태나 전제주의로 치닫습니다. 만장 일치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영구적 협정으로서의 소수의 지배는 전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수결의 원칙을 배척한다면 남는 것은 어떤 형태든 무정부 상태나 전제주의뿐인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한 지역에서는 노예 제도가 옳으며 확대되어야 한다고 믿는 반면에 다른 지역에서는 그것이 그릇되며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실질적 논쟁입니다. 헌법에 명시된 도망간 노예에 관한 조항과 대외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법률이 각기 시행되고는 있습니다만, 그것은 법률 자체가 국민의 도의심에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는 사회에서도 무슨 법률이든 항상 시행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두 경우 모두 국민 대다수는 무미 건조한 법적 의무만을 준수하며, 각 경우마다 소수의 사람들은 되풀이하여 법률을 어깁니다. 나는 이것이 완전하게 치유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지역간의 분리 이전보다 이후에 사정은 악화될 것입니다. 현재 불완전한 대로 금지되어 있는 대외 노예 무역이 한 지역에서는 궁극적으로 무제한으로 되살아날 것이고, 반면에 현재 부분적으로만 인도되는 도망간 노예들이 다른 한 지역에서는 전혀 인도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각 지역을 서로 떼어놓을 수도 없고 또한 지역과 지역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세울 수도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이혼하여 서로 얼굴을 맞대지 않고 발길이 닿을 수도 없는 곳으로 가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각 지역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각 지역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남아 있을 수밖에 없고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교류는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불만을 품은 국민 여러분, 내전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제 손이 아니라 여러분의 손에 달렸습니다. 정부는 여러분을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공격자가 되지 않는 한 전투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부를 파괴하겠다고 하늘에 맹세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정부를 “보존
☞보호 및 수호하겠다”는 가장 엄숙한 선서를 할 것입니다.
미흡하지만 끝맺음을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입니다. 우리는 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감정이 격앙되는 일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때문에 애정의 유대가 끊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억이라는 신비로운 심금은 모든 전쟁터와 애국자의 무덤에서부터 이 드넓은 땅 전역의 모든 살아 있는 가슴과 가정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심금에, 우리 본성에 깃든 보다 선량한 천사의 손길이 다시금 닿게 될 때면── 필경 그렇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 연방 찬가는 한층 드높게 울려 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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